"오늘 좀 한가한 날이니까 궁금한 거 5개씩 적어보고, 이따가 물어봐요"
"오늘 안 물어보면 안 가르쳐줄 거야"
동물병원에서 가장 오래 일한 나름의 "수"간호사가 일한 지 6개월 미만의 신참 간호사들에게 아침부터 숙제를 내줍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서 좀 놀랐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 간호사의 카리스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자세와 책임감, 그리고 센스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직장에서 한가한 날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 아싸, 일 없으니 편안하게 쉬엄쉬엄하자'
'좀 쉬는 날도 있어야지. 그동안 힘들게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돼'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덜 바쁘면 상대적으로 시간은 느리게 가서 좀 지루하기도 하지만, 정신없이 바쁜 것보다는 훨씬 낫다 여기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간호사는 한가한 시간에 쉬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굳이 부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을 가르쳐놓아야 본인이 편하니까 순전히 자신을 위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편하고자 하는 육신의 욕망을 이겨내고 귀찮은 일을 행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후임 가르치는 시간을 좀 가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윗고참으로서 후임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임이 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은 그 사람의 탓도 있겠으나. 선임이 충분히 잘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하면 보통 바로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충분히 생각해서 적을 수 있도록 했고, 구체적으로 5개라는 숫자를 정해주었습니다.
더해서, 오늘 안 물어보면 가르쳐주지 않을 거란 말로 (실제론 그렇게 하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상대로 하여금 약간의 긴박함(?) 또는 압박감(?)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몇 마디 말에서 훌륭한 태도와 지혜가 돋보입니다. 역시 병원의 믿을맨으로 원장님의 총애를 받고, 여러 수의사들의 인정 또한 얻어낼 만합니다.
질의응답 시간이 다가오자,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오늘 지나가면 못 배울 만큼 중요한 게 무엇인지, 찾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는 간호사들이 보입니다.
그 찬란한 광경 가운데, 원장님이 지나가면서 저를 힐끗 쳐다보십니다. 당신은 왜 가만히 있냐고 눈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느새 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수첩을 꺼내 엽니다. 그리고 가운 가슴주머니에서 볼펜 한 자루를 빼내 들어 꽁다리를 꼭 하고 누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