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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뉴 Feb 22. 2024

일곱 번째 의미,
신트라 호카곶에서

김성주 작가의 리스본 호카곳 여행기


여기, 땅이 끝나는 곳. 그리고 바다가 시작된다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가슴 뛰는 문장 아닙니까? 무언가 뻥 뚫리는 것도 같고요. ‘땅끝 마을’이라는 말을 이보다 더 낭만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나저나 아직 꽤 이른 아침인데 진작 와 계신 걸 보니 오늘에 대한 기대가 꽤나 크셨나 봅니다. 저처럼 밤새 뒤척이셨을 수도 있겠군요. 잠시나마 대륙의 끝지점을 독차지하는 꿈을 꿨는데 한 발 늦었습니다. 


다시 만나게 돼 정말 기쁩니다. 취중에 한 약속이라 흘려보내실 줄 알았는데요. 포르투(Porto)에서의 시간은 즐거우셨습니까? 리스본은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거라 자신합니다. 제가 지난 일주일간 푹 빠져 지냈거든요. 어제 리스본(Lisboa)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신트라(Sintra)로 오셨다고요. 새벽같이 또 호카곶(Cabo da Roca) 행 버스를 타셨으니 꽤나 고된 하루셨군요. 그래도 유라시아 대륙의 끝지점에 서 보니 그간의 수고가 아깝지 않으시죠?



|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호카곶

ⓒ 김성주 작가



바다를 향해 뾰족하게 솟은 이 곶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입니다. 우리의 고향이 이 대륙의 동쪽 끝에 가까우니 얼마나 먼 길을 달려온 것인지 실감되나요? 이 앞으로는 대서양이 끝없이 펼쳐지니 옛날 사람들은 아마도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실제로 14세기 후반까지 이곳이 세상의 끝으로 불렸다고 하니까요. 신이 깎은 듯 가파른 절벽에 파도까지 거세니 어쩌면 공포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겠어요. 지금은 푸른 초원에 빨간 등대까지 서 있으니 동화 속 풍경처럼 예쁘지만. 



ⓒ 김성주 작가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 모두 그렇겠지만 제게도 오늘은 무척 특별합니다. 두 달 전 서울을 떠나 올 때는 이 땅끝 마을의 존재를 알지 못했어요. 포르투갈에 올 계획도 없었고요. 마음, 걸음이 이끄는 대로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의 말을 이정표 삼아 걷다 보니 어느덧 동유럽에서 이곳까지 유럽 횡단이 되었습니다. 포르투 행 야간 버스에서 만난 여행자가 제 여행 얘기를 듣더니 대륙의 끝지점을 밟는 것이 분명 의미 있는 목표가 될 거라며 이곳을 추천했어요. 그래서 리스본, 신트라 행을 결심했고 포르투에서 만난 당신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상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호카곶에서 다시 만나면 어떨까,라고.



ⓒ 김성주 작가



무한할 만큼 길게 뻗은 해안선에 분명 이곳보다 더 가파른 절벽이 있을 겁니다. 더 푸른 초원, 반짝이는 자갈 해변도 있겠죠. 이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순전히 의미, 땅의 끝 지점이라는 의미 때문이라는 게 저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사람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를 ‘의미 짓는 것’으로 규정한 글이 떠오릅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거친 절벽에 모여든 사람들, 바위 사이에서 아찔한 줄타기를 하는 남자, 녹슨 채 주렁주렁 매달린 자물쇠들. 이 여정으로 우리를 이끌어 기록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스스로가 만든 의미라니 얼마나 부질없고 대단한일입니까. 우리가 다시 만나 느끼는 이 감정을 포함해서요.



| 천 년 전 어느 날로의 산책

숲 속에 숨은 보석, 신트라

ⓒ 김성주 작가



제가 너무 감상에 빠져 있죠. 잠시 접어 두고 좀 걸을까요. 여행 얘기하면서요. 아직 신트라를 둘러보지 않으셨으니 제가 어제 본 것들을 말씀드리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리스보아 현에 속한 이 작은 도시에는 천 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영광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트라와 호카곶을 하루, 이틀 정도 방문하지만 그 안에 다 보기 어려울 만큼 다채로운 것들이 있어요. 


저는 어제 무어인의 성(Castelo dos Mouros)과 페나 국립 왕궁(Palacio da Pena)을 방문했어요. 무어인의 성은 8-9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이슬람계 무어인들이 세운 성입니다. 천 년 넘는 시간 동안 성채는 상당 부분 소실됐지만 가파른 산맥을 따라 지은 성벽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저는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산책로를 따라 성에 올랐는데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고지대였어요. 그래도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신트라 문화경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으니 신발끈 꽉 묶고 올라 보시길 바라요. 저처럼 무모하게 걸어 올라가는 것보단 버스를 타고 편하게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 김성주 작가



무어인의 성 꼭대기에 다다르면 그보다 높은 위치에 지어진 그림 같은 성 페나 국립 왕궁을 보실 겁니다. 저는 아스라이 보이는 오색의 성채가 신기루처럼 느껴져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어요. 왕들의 별궁, 귀족들의 별채로 사용된 이 궁전은 산 아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강렬한 원색으로 칠해진 건물 전체를 봐도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다채로운 건축 양식과 포르투갈 전통 양식 아줄레주의 아름다움에 감탄이 나오더군요. 궁전 내부에 들어가면 실제 왕족들이 사용한 가구와 식기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내려다보는 광활한 풍경이 무척 좋았습니다. 이 외에도 신트라 궁전(Palácio Nacional de Sintra), 헤갈레이라 별장(Quinta da Regaleira) 등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역사적 건축물이 있으니 신트라에서의 시간도 꽤나 바쁘게 보내실 거예요.



| 어떤 여행의 이유는

그저 한 번의 황혼

ⓒ 김성주 작가



긴 여행에 하루 정도는 이렇게 망망대해 앞에서 노을을 기다리며 오후를 탕진해도 좋겠죠. 그러고 보니 포르투에서 만났을 때도 황혼 무렵이었네요. 포르투에서 본 것만큼 화려하진 않습니다만 세상의 끝에서 떨어지는 해를 본다는 것에 의미가 두도록 하죠. 저는 오늘 비엔나에서 신트라까지의 긴 여정을 자축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축하하시겠어요?



이 글은 포토그래퍼 김성주 작가가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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