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아침. 피부에 닿는 공기 온도가 미세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대야에 얼음 하나 띄운 정도의 시원함이지만 그 변화를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다. 더운 공기 속으로 냉기가 녹아 번지면, 만나는 사람마다 “여름 다 갔네. 이제 가을이야.” 하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그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찬장을 열어 홍차 티백을 꺼낸다. 뜨겁게 우려낸 홍차에 우유를 붓고 꿀 한 스푼 넣어 달달하게 완성하는 밀크티 한 잔. 향긋한 밀크티를 테이블에 올리고, 이제야 준비됐다는 듯 다시 창문을 연다. 두 팔 벌려 온몸으로 맞이하는 계절. 나는 이 가을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딱 이맘때였다. 십여 년 전, 첫 출근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한 시간 넘게 지하철, 아니 지옥철에 갇혀 있다 내린 후여서 일까. 역 출구에서 맞이한 그날의 상쾌함을 잊을 수 없다. 매연 가득한 대로변이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신선하고 산뜻하게만 느껴졌다. 긴 호흡으로 가을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던 기대감. 낯선 감정이었다. 새로운 환경 앞에서 이렇게 기분 좋게 설렜던 적이 있었던가. 회사 정문까지 뚜벅뚜벅 걸어가는 내내, 나는 확신했다. 왠지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신입사원의 첫날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 부서 저 부서, 층을 오르내리며 인사를 하고, 직무 관련된 내용들을 빠르게 파악해야 했다. 의지할 사람은 동기뿐이었지만, 동기들과는 다른 팀이었기에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일을 파악만 할 뿐, 아직 실무가 주어지지는 않아서 지루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도 많았다. 그럴 때는 또 어찌나 시곗바늘이 더디기만 한지. 그렇게 첫 일주일을 보내고, 드디어 바로 위 H선배가 업무를 분담해 주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나와 이름이 같은 그 선배는 면접 때부터 내 마음을 빼앗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대기 중이던 예비 후배들의 눈을 찬찬히 맞춰가며 일정을 설명하던 첫인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면접을 마치고 회사 문을 나서면서, 꼭 이 회사에 붙고 싶다고 생각했다. ‘친절하고 다정한, 저런 선배와 일할 수 있다면.’ 실은,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H선배와의 만남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요.” H선배의 목소리는 낮고 분명하면서도 상냥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한 마디지만, 그 말에는 형식적이지 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일을 지시할 때는 초보자의 입장을 고려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실수를 지적할 때도 격려와 응원을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종이를 덜컥 먹어버린 거대한 복사기 앞에서 쩔쩔매거나, 잘못 연결된 전화에 난처해할 때면 어김없이 다가와 해결해 주던 그녀. 자신의 지난 파일들을 뒤져가며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찾아줄 정도로 세심한 선배였다. H선배 덕에 나는 회사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의지할 동료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발걸음 가벼이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기획안 문제로 입사 이래 첫 난관에 봉착해 있던 어느 오후였다. 연이은 야근에 피로와 졸음이 몰아닥치던 그때, 누군가 파티션 너머로 길쭉한 종이컵을 내밀었다. H선배였다. “혹시 밀크티 좋아해요? 여기 대로변 카페에 밀크티 진짜 맛있어요. 마시고 힘내요!” 뚜껑을 열자 하얀 우유 거품 위로 홍차 향이 짙게 퍼져나갔다. 입 안에 꽃잎을 머금은 것처럼 부드럽고 향기로운 맛이었다. 밀크티가 이렇게 향긋하다니. H선배의 고운 마음이 더해져 감미로움이 배가된 것일까. 그날 이후, 밀크티는 나의 최애 음료가 되었다. 진한 카페인 충전이 필요한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밀크티 한 잔을 벗 삼아 오후를 버텨내곤 했다.
가을이 무르익던 어느 날, 제법 적응해 간다고 생각했던 내게 위기가 찾아왔다. 조직 개편을 맞아, H선배의 팀 이동이 결정된 것이다. 퇴근 후 회사 근처 카페에 마주 앉은 내게 선배는 직접 자신의 자리 이동 소식을 전했다. “실은 한참 전부터 팀 이동을 신청했었어요. 신입 들어오는 거 알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미뤄왔는데 이제 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자신이 더 챙겨줘야 하는데 팀을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서운함을 느끼기엔 받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되레 우리 사이에 쌓인 견고한 신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무렵,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 입을 모아 하던 말이 있다. 회사 동료는 그저 동료일 뿐이라고,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그런 말은 H선배를 향한 내 마음을 멈칫하게 했다. 그저 형식적인 관계라는데, 내가 너무 선배에게 의지하는 건 아닐까.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내가 받은 선의가 너무도 분명했기에 선배의 마음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받은 친절을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어떤 관계든 결국엔 마음의 문을 얼마큼 여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혹시 자리에 따라 한계를 미리 설정해 버리느라 놓친 인연이 있는 건 아닐까. 그 가을, 나는 ‘직장 선후배’라는 말 앞에도 ‘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새겨질 수 있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애니메이션 스케치로 장면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처럼 분명하고 또렷했다.
비록 H선배와 한 팀에서 일한 기간은 짧았지만, 이후로도 선배는 회사 생활 내내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고민스러운 일,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고 조언을 구했다. 넓고 큰 회사에서 마음 맞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후, 결혼과 이직, 출산으로 많은 변화를 겪은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예전처럼 자주 연락하진 못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한결같이 편안하다. H선배만 만나면 나는 예의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의 모습으로 돌아가 앓는 소리를 내곤 한다. 그러면 그녀는 초가을의 맑은 하늘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를 토닥인다.
가을만 되면, 점심시간에 밀크티 한 잔을 손에 들고 선배와 함께 걷던 산책로가 떠오른다. 노란 은행나무 빛을 눈에 담으며, 바삭한 낙엽들을 발끝으로 휘저어 걷던 길.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 다음 날엔, 터진 은행들이 내뿜는 고약한 냄새를 피해 종종 대던 발걸음. 밀크티를 팔던 카페는 아쉽게도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보다 더 맛있는 밀크티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어떤 맛도 그 시절의 맛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밀크티를 마신다. 우러난 홍차에 깊어진 그리움을 더해가며 향기롭게 이 가을을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