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얼른 일어나, 오늘 생일 파티 가야지!”
토요일, 늦잠을 방해하는 작은아이 목소리에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전 6시 40분. 동트기 전이라 바깥은 캄캄하기만 하다. 언제 일어난 건지 아이는 홀로 세수와 양치까지 마친 얼굴이다. “생일 파티는 10시야. 아직 시간 많은데?” 이불을 끌어올리며 더 누워 있겠다는 의지를 내비쳐 봐도, 아랑곳 않고 내 어깨를 흔드는 작은 손. 아이를 따라 환하게 불이 켜진 거실로 나오니, 바닥에 가지런히 펼쳐진 원피스와 레깅스가 눈에 띈다. “짜잔! 오늘 입고 갈 파티룩이야.” 오랜만에 가는 생일파티여서일까. 배시시 웃는 얼굴에서 들뜬 마음이 느껴졌다. 문득, 작년 처음 파티에 가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아이보다 내가 더 일찍 일어났었는데. 긴장감에 혼란했던 그때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작년 이맘쯤이었다. 잔잔한 일상에 날아온 초대장 하나로 온종일 요동치던 마음을 잊을 수 없다. 클래스 공지를 확인하던 중, 메일 수신 알람을 클릭하니 "애나벨의 생일파티에 초대합니다"라는 애니메이션 카드가 펼쳐졌다. 보라색 유니콘 그림에 간단한 인사말과 시간, 장소가 적혀 있었다. 참석 여부를 체크해 보내야 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는 가고 싶다고 했지만 내 손가락은 선뜻 Yes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미국에 온 지 갓 한 달이 넘은 시점. 이곳 아이들의 문화나 놀이 방식에 대해 전혀 몰랐을 때였다. ‘선물은 뭘 준비해야 하지?’, ‘가서 아이가 잘 어울리긴 할까?’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로 그 시간을 견뎌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났다.
그렇다고 번번이 초대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까이에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였다. 사적인 모임을 통해 친구들과 더 돈독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곳까지 와서 움츠려있고 싶지만은 않았다. 다양한 경험과 문화 체험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겪어보자 다짐하지 않았던가. 초대장에 명시된 파티 시간은 단 두 시간. 그 정도면 버틸 만해 보였다. 며칠 고민 끝에 나는 마침내 YES 버튼을 눌러 회신을 보냈다.
참석 메일을 보낸 후부터, 내 마음은 소란스럽게 분주해졌다. ‘5세, 미국 친구, 생일 선물’을 키워드로 몇 날 며칠을 검색했는지 모른다. 고심 끝에 고른 선물을 아이와 함께 단정히 포장하고 적당한 크기의 쇼핑백도 마련했다. 아이의 그림을 넣어 색지로 손수 만든 카드도 준비했다. 미국에서 겪는 나름의 첫 ‘사교 활동’이었다.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디딜 때처럼 묘하게 긴장감이 끓어올랐다.
드디어 파티 날, 정성스레 마련한 선물을 들고 애나벨의 집 앞에 도착했다. 열린 문틈으로, 이미 도착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현관에 들어서자, 천장에 장식된 오색 풍선과 함께 애나벨의 엄마 아빠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와 줘서 고마워요. 우리 애나벨이 OO 얘기 정말 많이 했어요.” 다정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아이는 순식간에 친구들 손에 이끌려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아이들은 어쩜 저리도 스스럼없이 손을 내미는 걸까. 신발을 벗어던지고 초록 잔디 위에서 총총 달리는 아이를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문제는 나였다. 갑자기 낯가림하는 백일 아기처럼 초조함이 엄습했다. 애나벨 엄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데도 듣기 평가하듯 집중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하는 말이 문법에 맞나 신경 쓰다 보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흐릿해져 자꾸 길을 잃었다. 다른 부모들은 마당 데크 위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자리를 옮겨가며 스몰토크를 즐기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친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홀로 얼음땡 놀이에 갇힌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 멀뚱히 서서 마당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색함’이란 단어를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해 그린다면 딱 그날의 내 모습이 될 것만 같다. 혼자서 다른 장르의 무대 위에 세워진 듯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러고 있는 건 너무 어색해. 누구라도 말 좀 걸어줬으면.’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볼까?’ 하는 잠깐의 용기, ‘아니야, 아무도 다가오지 마!’ 하며 도망치는 마음속에서 수시로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아, 잘못 왔나?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싶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날은 왜 이리 더운지, 이마엔 눈치 없이 땀방울이 맺혔다. 손부채로 얼굴의 열기를 식히며 고개를 돌리는데, 순간 건너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였다. 장난감 미로 속 구슬이 출구를 찾아 또르르 굴러가듯, 여기저기 헤매던 마음이 기우뚱 한쪽으로 움직였다. 피하지 않는 방향으로, 용기를 내보는 쪽으로. 순식간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OO 엄마로군요. 반가워요. 안 그래도 한번 연락하려고 했었어요.” 용기 내 말을 건 내게 그녀가 한 말이다. 무슨 일로 연락하려 한 걸까,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그녀가 덧붙였다. “우리 애가 OO이랑 플레이데이트 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지난번에 미술 시간에 같이 드로잉 하면서 재밌게 놀았나 봐요. 날짜를 한번 정해볼까요?”
왜 망설였었나 싶게, 한 번 물꼬를 트니 여기저기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누군가와는 플레이데이트를 약속하고, 누군가와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또 누군가와는 통성명을 하는 것에 그치면서. 여전히 나는 영어의 늪에서 허우적 댔고 더위 탓인지 몽롱한 기운에 진이 빠졌지만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였다. ‘우두커니 서 있는 것보단 힘들어도 부딪쳐보는 게 낫다!’ 한국에서라면 낯선 엄마들 모임에 나가 여기저기 말을 거느라 애쓰진 않았을 것이다. 불필요한 관계에 시간을 쏟지 않겠다는 나름의 신념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 모임과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건, 신념이 아니라 그저 회피일 뿐이라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감 부족,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 때문에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것. 그렇게 피하기만 하는 내 모습이,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생일파티의 경험은 그렇게 나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떤 자리에서든 도망치지 않도록, 언어의 장벽 앞에서 소심해지지 않도록. 상대의 당혹스러운 대화 속도와 친화력에 가끔씩 망연자실함과 어지럼증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나름의 노하우도 있다. 만남 전에 미리 말할 거리를 생각해 놓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자주 나누는 스몰토크 주제를 찾아서, 질문과 대답을 미리 연습했다. ‘할 말’을 총알처럼 장전하고 있을 때와 아닐 때, 그 자신감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깃거리를 풍족히 채워간 어느 날엔 되레 내가 대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너무 잘하려고,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도 살포시 내려놓았다. 처음엔 상대가 내 발음을 못 알아듣고 고개를 살짝만 갸우뚱해도 귀가 빨갛게 뜨거워졌다. 창피한 마음에, 입 밖으로 나오려던 문장들이 목구멍에 탁 걸려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하지만 영어가 내 모국어가 아니란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고, 발음은 슬프게도 금방 좋아지기 어렵기에. 원어민처럼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렇게 짐을 덜어내자 주저하던 마음에도 조금씩 여유가 찾아왔다.
어쩌면 내가 피하고 싶었던 건 좌절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인들 앞에서 그들과 같은 수준의 언어 능력으로 대화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자꾸만 나 자신이 미숙한 사람처럼 느껴져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계속 뒷걸음질 쳤다면 어땠을까? 아마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이들 모임이나 행사 참여 메일이 올 때마다 거절의 말들을 찾기 바빴을 것이다. 지금 와 알게 된 건, 좌절과 자괴의 순간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에 따라 영원한 고립에 빠지기도, 혹은 도약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것. 그리하여 요즘 자주 되뇌는 말은 이런 것이다. 눈 딱 감고 한 번쯤 대차게 뛰어들어 보자. 도움닫기 하듯 망설임 없이.
파워 내향형인 나는 아이들 모임 자리에만 갔다 오면 기운이 쏙 빠져 넋 나간 상태가 되고 만다. 눈치 빠른 신랑이 "얘들아, 엄마 방해하지 말고 우리 나가자." 하며 문을 닫아주면, 그제야 홀로 조용히 회복의 시간을 맞이한다. 이 순간이 달콤한 건, 지치더라도 잘 소모되었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런 피로감은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한숨 자고 일어난 것처럼, 무겁지만 개운하다. 여전히 영어는 잘 안 들리고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어색하지만, 오늘도 부딪쳐볼 용기를 내어본다. ‘까짓것, 해보지 뭐!’ 주문 외듯 나를 다독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