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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Dec 02. 2023

겨울밤과 고구마

나의 겨울은 고구마와 함께 온다. 가을 잎이 다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우리 집 다용도실 구석은 흙 묻은 고구마 박스들로 채워지곤 했다. 언제부터 고구마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억 저편에, 아주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이 둘러앉아 뜨거운 고구마를 후후 불던 장면들이 남아 있다. 쟁반에 수북이 쌓인 보라색 껍질과 그 껍질을 벗기느라 끈적해진 손톱 밑, 그 너머로 주고받던 정다운 하루 끝의 안부까지. 추운 밤, 온기가 필요해서였을까. 네 식구가 유난히도 붙어 앉아 그렇게도 고구마를 까서 먹었더랬다. 찜기에서 막 꺼낸 고구마에 앗 뜨거 호들갑을 떨다가, 개성 넘치는 모양을 발견하면 오빠와 키득키득 웃어가면서.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의 내가 슴슴한 구황작물의 맛을 정말 좋아했는지 의문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맛보다는 아마도 그 시간의 온화한 분위기에 취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구마의 참맛을 즐기게 된 건 '군고구마'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의 손에 갈색 봉투가 들려 있던 어느 날이었다. 벌어진 봉투 틈으로 솔솔 풍겨 나오던 구수한 냄새. 홀린 듯 종이봉투를 헤집는 내 뒤에서 아빠는 엄마에게 군고구마 청년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핑계 대듯 말했다. 분명 고구마였지만, 군고구마는 그동안 내가 먹어왔던 찐고구마와는 완전히 달랐다. 까맣게 그을린 껍질과 참을 수 없이 고소한 향, 쫀득한 식감. 무엇보다...... 달았다! 그저 감자보다 조금 덜 밍밍한 뿌리채소인 줄만 알았는데, 고구마에서 꿀맛이 날 수도 있다니. 그날 이후 구운 맛에 빠져버린 나는 시장에 둥그런 양철 기계가 보일 때마다 엄마를 졸라댔다. 엄마는 쉽사리 지갑을 열지 않았다. “집에서 쪄먹으면 되지, 있는 걸 왜 사 먹어.” 그것과 이건 맛이 다르지 않느냐고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좀체 흔들리지 않았고, 가끔씩 구수한 갈색 봉투를 들고 퇴근하는 아빠에게 슬며시 눈을 흘겼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찬바람에 코가 빨개진 내 앞에 반짝 윤이 나는 고구마 조각들이 놓였다. 설탕 옷을 입고 딱딱해진 고구마 단면과 포슬포슬 익은 속살. 오븐이 없어 군고구마를 만들 수 없는 우리 집에서 엄마가 차선으로 선택한 메뉴인 '맛탕'이었다. 이가 썩는다고 초콜릿도 안 된다, 캐러멜도 안 된다, 단 맛이 나는 건 좀체 허락하지 않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설탕과 꿀로 뒤범벅된 요리를 해주다니. 달콤한 맛탕 한 조각과 살짝 데운 우유. 그 조화로움을 음미하다 보면, 뜨거운 물에 각설탕이 녹아내리듯 스르르 몸이 풀렸다. 이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간식이지 않을까. 어린 나는 달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만족스러운 듯 물끄러미 바라봤다.

     

11월이 되니 텍사스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영하로 떨어질 리 없는 겨울이지만 미국에 와서 맞이하는 이 계절은 어쩐지 한국에서보다 더 춥고 시리기만 하다. 본격적인 겨울을 앞두고 나를 슬프게 하는 건 '맛있는' 고구마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이다. Sweet Potato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미국 마트에서 산 고구마들에선 감자 맛, 무 맛, 당근 맛이 나기 때문이다. 몇 차례 실망을 거듭한 끝에 맛탕을 해보자 싶어 고구마를 잘랐다. 깍둑 소리가 경쾌하게 도마 위에 울릴 때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부엌을 오갔다. 솔솔 검은깨를 뿌리고 접시 가득 달큰한 조각들을 내어주니, 순식간에 모여들어 포크를 흔드는 아이들. 뜨거운 조각을 한입에 다 넣는 큰아이와, 신중하게 모서리부터 베어 무는 작은아이의 입모양이 그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맛있다고 엄지를 들어 세우는 아이들 모습에 왜 그리도 가슴 한켠이 뜨끈해지던지. 그날의 내 마음과, 마치 타협점을 찾듯 처음으로 맛탕을 만들어주던 엄마의 마음은 닮은 듯 달랐을 것이다. 해줄 수 있는 기쁨과 해줄 수 없는 심정, 그 사이의 거리와 온도 차를 짐작하다 보면 왜인지 눈물이 핑 돌고 만다.


“이거 너 가져가.” 결혼 후 친정에 들른 어느 날, 엄마가 뜯지도 않은 새 상자를 꺼내오며 말했다. “에어프라이어야. 여기다 고구마 넣고 돌리면 군고구마랑 똑같아.” 에어프라이어라면 나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너네 집에 있는 건 너무 작아. 고구마 몇 개 들어가지도 않겠더라. 이건 큰 거니까 여기다 군고구마 많이 해 먹어.” 내가 에어프라이어를 산 이유는 군고구마를 위해서가 아니었지만, 엄마가 내게 그 기계를 선물한 이유는 분명해 보였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왜 다정한 말 대신 모난 말이 먼저 나갔는지. “주방이 작으니까 작은 걸 산 건데, 이 큰 걸 어디다 둬.” 그 말을 하고 나니 어릴 적 시장 입구에서 투정 부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군고구마 기계 앞을 지날 때면 내 손을 거칠게 잡고 걸음걸이가 빨라지던 엄마의 얼굴도.


그즈음, 이젠 고구마도 구운 것보다 찐 게 더 맛있다고 말하고 다니던 나였다. 엄마도 분명 알고 있었다. 내가 밤고구마, 호박고구마 가리지 않고 종류별로 쪄 먹는 기쁨을 즐기고 있다는 걸. 그런데도 꼭 군고구마를 해 먹으라면서 에어프라이어까지 들이밀고 마는 엄마다. 아무리 만류해도 내 힘으론 그 속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덤덤히 엄마가 건넨 상자를 트렁크에 싣고 돌아오는 것뿐. 해준 것보다 주지 못한 것에 더 마음 쓰는 것, 어쩌면 그것이 부모의 숙명이라는 걸, 아이를 낳고 나서야 조금씩 알아간다.


며칠 전 한인마트에서 ‘한국 고구마’를 발견해 장바구니 가득 채워 왔다. 해남꿀고구마, 강화호박고구마만큼 당도가 높진 않겠지만 반가운 마음에 외면할 수 없었다. 한솥 찐 고구마를 쟁반에 담고선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찬 바닥에 담요를 깔고 그 위에 쟁반을 올렸다. 그러자 큰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엄마 왜 이불 위에서 먹어요?”, “응, 엄마 어릴 땐 이렇게 먹었거든. 우리도 한번 해보자.” 담요 밖으로 엉덩이가 빠져나가지 않게 붙어 앉아, 뜨거운 김이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 지루한 그 순간에도 아이들은 뭐가 재밌는지 입가에 웃음이 배실배실하다. 그날의 고구마 맛은 역시나 심심했다. 그 싱거움이 오래전 오빠와 나누어 먹던 못생긴 고구마 맛과 비슷해서 다시금 추억에 빠져들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어느 때보다도 달달한 밤이었다. 내게 고구마는 결핍이 아닌 사랑이라는 걸 확인하는 밤. 이렇게 또 겨울이 왔다. 올해도 변함없이 고구마와 함께. 두런두런 포근해질 겨울밤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 계절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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