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너무 부끄러워.”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작은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괜찮아,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달래면 잠시 진정되는 것 같다가도 생각할수록 안 되겠는지 다시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고 만다. 체육 발표회를 이틀 앞두고, 딸아이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며칠 째 투정을 부리는 중이었다. 집에서는 매일 큰 소리로 노래도 잘하고 거울 앞에서 잔망스러운 표정을 지어가며 패션쇼까지 하는 아이다. 수줍음 많은 큰아이라면 모를까, 우리 집에서 가장 활발하다고 생각했던 작은아이가 이렇게 부끄럼을 탄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상황에 나 역시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팬데믹 때문에 무대 위에 서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외워야 하는 율동이 어려운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아이가 쭈뼛쭈뼛 걸어오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안 하면 안 돼? 안 하고 싶어.” 그 말만은 나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아이는 이어서 ‘선생님께 자기를 빼 달라 요청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애걸하듯 말했다. 아이의 의도와는 달리, 그 말은 오히려 내 인내심에 방아쇠를 당겼다. 걱정스러움이 못마땅함과 속상함으로, 마침내 분노로까지 번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애들 다 하는데, 왜 너만 못하겠다는 거야? 해야 돼!” 마무리는 버럭, 샤우팅 한 마디. 결국 나의 날카로운 말에, 아이는 자기 맘을 아무도 몰라줘 서럽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이가 발표회에 나서기 싫어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어린 시절, 나 역시 사람들 앞에 서는 걸 무척 꺼려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장기 자랑 같은 건 나가볼 엄두도 못 냈고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까 봐 늘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곤 했다.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조차 자신 있게 손들지 못했다. 내 번호와 달력의 날짜가 겹치는 날이 되면 아침부터 초조함에 목이 탔다. “3일이니까 3번이 읽어봐.” 차라리 기습 지목을 받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그 순간 떨리는 건 똑같은데, 지목받을 걸 알고 미리부터 긴장하느라 그 하루를 망치는 기분이었다.
마인드 컨트롤을 한답시고 ‘뭐 어려운 일 아니잖아, 책 읽으라면 읽고 질문하면 대답하는 거지 뭐.’라고 속으로 혼잣말하다 오히려 자기 비하에 빠지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은 거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바보같이 대체 이게 뭐라고.’ 큰 목소리로 자신 있고 똑 부러지게 목소리를 내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장기 자랑 시간에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춤을 추고, 김건모의 <핑계>를 멋들어지게 불러내는 친구들을 볼 때면 신기하기까지 했다. 사람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무언가를 해낸다는 건 정말이지 초능력보다도 더 대단한 능력처럼 느껴졌다.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내겐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이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무대의 맛’을 느낀 건 5학년 때였다. “체르니 40번까지 쳐 본 사람?” 음악 수업을 앞두고 담임선생님께서 물으셨다. 피아노를 배우고 있던 나는 별 의심 없이 정직하게 슬쩍 손을 들었다. 나를 제외하고도 예닐곱 명의 손바닥들이 머리 위 허공으로 덩그마니 올라왔다. 선생님은 우리를 훑어보더니 각기 다른 악보를 한 장씩 나누어 주셨다. 음악 시간에 오르간 반주를 돌아가면서 하면 좋겠다고, 각자 맡은 곡을 집에서 연습해 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연주해야 할 반주곡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겨우 한 곡, 단 하루만 반주에 나서면 되는 거였는데도, 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방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반 친구들 앞에서 오르간을 쳐야 한다니, 쑥스러움과 부담감 때문에 생각만으로도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안 할래요.’ 말하고 싶었다. 그건 뭐 쉬운 일일까. 무서운 선생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주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틀리면 어쩌지, 긴장해서 박자가 빨라지면 어떡하나. 덜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드디어 오르간 앞에 앉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토오-옹일” 내 반주에 따라 입 맞춰 노래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페이드아웃 처리된 화면처럼 그 순간이 흐릿하게 흘러갔다. 기억나는 것은 그저 의자에 앉는 순간까지 바들바들 떨리던 다리와 땀 때문에 축축해진 손바닥, 반주가 끝난 후 느꼈던 후련함뿐이었다. 그건 단순히 ‘드디어 끝났다’ 하는 시원함과는 조금 달랐다. 쿵쾅 거리던 심장의 요동이 잔잔해지고 거센 바람에 흔들리듯 불안하던 마음이 한순간 차분해졌다. 고요해진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오랜 시간 땀 흘리며 걷다가 시원한 솔바람으로 온몸을 샤워하는 느낌이랄까. 무거웠던 마음 한 구석에 상쾌함이 들어차며 뿌듯함이 피어올랐다. 돌이켜보면 그건 아마도 내가 태어나 처음, 제대로 느껴 본 성취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후로, 나는 한층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리가 없다. 학창 시절 내내, 앞에 나설 일이 있을 땐 경운기를 타고 자갈길을 건너듯 목소리가 달달 떨렸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다만, 거듭된 경험들이 맷집처럼 두터워지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이러나저러나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으니 이런 나 자신을 그냥 받아들이는 게 더 속이 편하다는 것이다. 떨리는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게 나란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 ‘그래, 내가 그렇지 뭐’ 하고 편하게 여기면서부터 오히려 ‘난 왜 이럴까’ 자책하고 나 자신을 못났다 생각하던 감정들이 점점 작아졌다. 대신, 해내고 난 후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기대감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극도의 긴장감 뒤에 극강의 뿌듯함이 따라온다는 것. 이 잠깐의 고통을 견디고 나면 박하 맛 사탕이 입안에 녹아들 듯 짜릿한 기쁨이 찾아오리라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성가시고 부끄럽고 도저히 못하겠다 싶은 일들도 ‘기회’처럼 여겨졌다. 도전해 이루어보는 기회, 그럼으로써 성취감을 얻는 기회.
그렇게, 나는 손들고 나서진 못해도 일단 맡으면 어떻게라도 해내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대학교 동아리 회장으로 뽑혔을 때도, 동아리 창립 기념일에 맨 앞줄에서 보아의 <넘버원>을 춰야 했을 때도. 비록, 매주 떨리는 염소 목소리로 회의를 진행하느라 스트레스가 극심했고, 감당 못할 몸뚱이를 허우적대며 춤춘 흑역사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한 해를 마친 후, 나는 확실히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마음 구조를 사진 촬영하듯 찍어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이전보다 성취감의 영역이 미세하게나마 넓어졌을 거라 확신할 만큼. 그때 알았다. 경험은 보이지 않는 거름이 되고, 그 덕에 마음의 뿌리도 시들지 않고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겨우 일곱 살은 부끄러움에 대한 역치가 높을 나이 아니냐며, 나는 작은아이의 두려움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어쩌면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의 감정을 애써 부정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잘 타이를 수도 있었을 텐데 무조건 해야 한다고 윽박지른 것 역시 나를 닮은 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홀로 방에서 입을 삐죽이고 있는 아이에게 다시 다가가 말했다. “엄마도 어릴 때 그랬어. 부끄럽고 긴장되고. 사실 지금도 좀 그렇고.” 아이가 나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피하기만 할 수는 없어. 일단은 해보는 거야. 잘 못해도 괜찮아.” 정말 괜찮다는 걸 아이 스스로 온전히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모든 경험은 분명 소리 없이 강하게 아이에게 스며들 거라 믿는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만 하는 상황, 하기 싫다고 말할 수도 없는 답답함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그저 아무 얘기 안 들리고 엄마가 야속하게만 느껴지겠지만 언젠가 웃으며 오늘을 회상할 수 있기를. 나를 닮은 너에게 조용히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