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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Jan 26. 2024

다 이유가 있겠죠!

생각이 복잡할 때 자주 하는 일은 오래된 필사 노트를 꺼내 읽는 것이다. 책을 읽은 날짜와 마음에 닿은 문장들, 그에 대해 짤막하게 정리해 놓은 감상들까지. 살피며 읽다 보면 빗살 사이 틈 없이 엉켜 붙은 머리카락처럼 복잡했던 마음에도 한결 여유가 찾아온다. 며칠 전, 오랜만에 꺼낸 필사 노트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는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소리란 없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고, 열다섯 살이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솔직했다.’                       

-루이자메이올컷 지음, 공보경 옮김, 윌북출판사, 110쪽- 

    

어릴 때부터 즐겨 읽던 책 「작은 아씨들」에서 내가 자주 되새기곤 하는 문장이다. 기록한 날짜는 2020년 3월 13일. 정확히는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소리란 없다’라는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전에도 읽었던 책이지만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이 문장에 관심을 두게 된 건, 그즈음 내가 유난히도 뾰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아이 육아로 한창 지쳐있을 때였다. 팬데믹 때문에 갇혀 지내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단했던 시기. 친절과 다정의 말보다는 투정과 비난의 말들이 더 익숙했다. 누군가 내 의견과 다른 입장에 서면 속으로 ‘말도 안 돼’ 하며 선을 그었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목도할 땐 ‘이해할 수 없어’ 하고 돌아섰다. 거리두기 상황에서 여행 사진 올리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고,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말들에 변명일 뿐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이해하는 건 왜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을까. 그래서인지 미움은 늘 이해보다 쉬웠고, 뾰족한 내 마음은 자주 쉬운 쪽을 택했다.

      

책에 밑줄을 긋고, 필사 노트에 해당 문장을 옮겨 적던 밤을 기억한다. 문장을 여러 번 곱씹던 나는 노트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덧붙였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동시에 내가 기억해 낸 것은 몇 해 전 비행기 안에서의 장면이다. 안절부절못한 채 비행기가 활주로에 멈춰 서기만을 바라던 내 모습. 환승 시간이 두 시간밖에 안 되는데, 타고 있던 비행기가 이미 한 시간 연착된 바람에 시간이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비행기가 멈추고, 앞 좌석 승객들부터 차례대로 짐을 꺼내 내릴 준비를 하는데, 순간, 고민스러웠다. 내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무래도 늦을 것 같은데 그냥 먼저 나갈까? 고민하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죄송합니다’ 말하며 먼저 앞으로 발을 옮겼다. 진땀을 흘렸지만 덕분에 비행기는 놓치지 않았다.


그 당시 친구들과 ‘꼴불견 승객’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좌석 순서 무시하고 먼저 나가려 일어서는 사람 정말 이해 안 돼.” 하며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그거 조금 일찍 나간다고 뭐가 달라지나?” 덧붙이면서. 그런데 내가 그런 꼴불견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무사히 갈아탄 비행기 안에서 왠지 마음이 불편해진 채로 이전의 행동을 계속 떠올렸다.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보다는 그간의 편협한 생각에 대한 반성이 앞섰다. 각자의 사정을 무시한 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은 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잊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이후로, 나는 자주 주문처럼 ‘다 이유가 있겠지’ 하고 외곤 한다. 신기하게도,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아줌마를 만나도, 길에서 내 어깨를 치고 빠르게 달려가는 사람을 만난 날에도. ‘왜 저래!’ 보다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하셨나 보다.’ ‘바쁜 일이 있나?’ 생각하다 보면 어쩐지 그들의 당황스러움이 안쓰럽게 느껴져 응원하는 마음이 솟아나기도 한다. 덕분에 얻은 좋은 점이 있다면 무리에 휩쓸려 흉보거나 타인의 단점을 부각하는 태도를 지양하게 됐다는 것. 미움이 줄어들수록 모난 마음이 다듬어지면서 고요하고 잔잔한 상태가 찾아옴을 느낀다.       


“미국 여행을 할 때가 있었는데 2층짜리 버스를 탔어요. 그때 어떤 여성분이 거기서 매니큐어를 막 칠하고 계셨어요. 냄새나고 싫었는데 그냥 만약 내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면 너무 사랑스럽게 그리고 싶은 인물인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싫은 사람이 없어요 이제는. 다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여서. 다르게 말하면 연민을 갖고 서로 생각하면 편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만약에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 버려요.”

-이옥섭 감독, <서울체크인 8화>-


우연히 본 영상에서, 너무 미우면 사랑해 버리라는 이옥섭 감독의 말에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랑은 쉬운 길은 아닐 테지만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마주하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상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쉽게 판단하고 가볍게 선을 그어버리기 전에, 이해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면면히 들여다보는 넉넉함을 갖추고 싶다. “다 이유가 있겠죠!”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 끄덕이면서. 혐오와 비난의 마음으로 괴로워질 때면 내겐 너무도 해답 같은 필사 노트를 다시 열어볼 테다. 잊고 있던 다짐들을 들추어내며, 그렇게 사랑의 방향으로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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