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타고 낯선 음악을 들으며 어둠을 달린다. 깜깜한 새벽을 뚫고 찬 공기를 가르며 도착한 공항.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어둠이지만 공항 안은 분주한 도심처럼 환하게 깨어 있다. 기대와 설렘을 양손 가득 쥐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여행의 시작점은 어디서부터 일까. 목적지에 도착할 때부터, 아니면 짐을 쌀 때부터?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부분 밤잠을 설쳤을 테지만 공항 내 사람들의 얼굴은 막 떠오르는 태양빛만큼이나 환하기만 하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봄방학을 맞아 올랜도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다녀왔다. 올랜도는 우리 가족이 재작년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로드트립을 떠났던 도시이기도 하다. 드넓은 텍사스주를 벗어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는지. 동쪽으로 동쪽으로, 텍사스를 넘어 루이지애나주를 거쳐 플로리다주의 올랜도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더랬다.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그렇게나 험하게 갔다니, 기내에 편히 앉아 그때를 회상하다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올랜도는 봄의 훈기와 여름의 열기가 반반 섞인 딱 좋은 온도로 우리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날씨에 한층 들떠서는 부푼 마음으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입장했다. 평일이지만 봄방학 시즌이다 보니, 놀이공원 안은 예상대로 북적였다. 해리포터 책과 영화를 모두 완주한 큰아이 주도로, 우리는 먼저 호그와트 성으로 향했다. 영화 속 세트와 똑같은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진 아이는 어서 빨리 어트랙션을 타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첫 번째로 고른 어트랙션 입구에는 대기 시간 한 시간을 알리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해?’ 예상했던 바였지만 혼잡한 사람들 틈에 섞일 생각을 하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긴긴 하루가 되겠구나 체념하며 기다림 행렬에 합류했다. “우와, 엄마 저 액자 좀 봐요. 영화에서 나온 거랑 똑같이 움직여요!” 구불구불 이어진 긴 줄을 따라 좁은 통로를 지나는데, 아이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도록 대기 공간 곳곳에 영화 속 캐릭터와 장면들이 구현되어 있었다. 사진이 움직이는 신문, 액자 안에서 다투는 마법사들, 움직이는 빗자루까지. 리얼한 조형물들을 구경하다 보니 대기 시간도 제법 지루하지 않게 흘러갔다. 한참을 돌고 돌아 드디어 탑승에 가까워졌을 즈음, 아이가 슬며시 내게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빨리 들어가요?”
아이가 가리킨 쪽은 익스프레스 티켓 전용 라인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안 그래도 신랑과 익스프레스 티켓을 구입할 것인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었다. 해당 티켓을 소지한 사람은 전용 라인에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 놀이기구에 탑승할 수 있다. ‘시간을 돈으로 사는 거잖아?’ 솔깃한 제도에 후기를 찾아보니 ‘필수템!’, ‘꼭 익스프레스로 타세요.’ 등의 추천 글들이 가득했다. ‘성수기니까 이 티켓을 사는 게 현명한 거 아닐까?’, ‘아니야, 우리 애들은 아직 무서운 놀이기구를 못 타니까 별로 유용하지 않을 것 같아.’ 여러 날 고민 끝에 우리는 결국 일반 티켓을 예매했다. 일인당 20여 만 원씩 추가되는 비용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큰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 솔직하게 ‘빨리 탈 수 있는 티켓을 더 비싼 값에 구매한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그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저렇게 바로 들어온 거예요? 저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소품과 장식물들 중에 제대로 못 본 것도 있겠네요. 아! 아쉽겠다.” “응? 아... 그럴 수도 있겠네.” 큰아이는 가끔 이렇게 나를 멈칫하게 만드는 말을 한다. 한 방향만 바라보는 나의 소맷단을 잡아당겨 다른 쪽으로도 시선을 돌리게 하는 말들. 아이의 말을 듣고 다시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성큼성큼 탑승칸을 향해 쭉쭉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겐 조형물 앞에 잠시 멈춰 사진 찍을 시간도,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수시로 멀어지는 앞사람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자석에 이끌리듯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큰아이는 그 모습을 그다지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놓친 것들, 그러니까 기다리는 동안 보고 들으며 체험한 곳곳의 조형물들은 아이에게 그저 지루함을 채우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견고한 설치물들 속에서 자신이 책과 영화에서 본 내용들을 회상하며 매 순간 감탄하기 바빴다. “우와, 저기 덤블도어 방도 있어요! 어, 이 장면 기억나요!” 아이에게는 기다림의 여정도,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어트랙션의 일부였던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익스프레스 라인에 등을 돌린 채로 서 있었다. ‘역시 비싼 티켓을 사는 게 나았을까’ 긴 줄에 다리가 아파오면서 조금씩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반대쪽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얄미운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큰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도 분명 있을 테니. 그렇다면 서두르느라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천천히 만끽하면 되는 일이었다. 무릇 놀이공원이란 기다림을 배우는 곳이 아니던가. 견뎌내는 기다림이 아닌 누릴 수 있는 기다림. 그날, 우리는 어딜 가도 내내 한 시간 이상 줄을 서야 했지만 큰아이 덕분에 마음이 환해진 나는 그 시간을 나만의 기쁨들로 채워나갈 수 있었다.
많은 장면들이 마음에 남았다. 롤러코스터 타기 무섭다며 아빠 목덜미를 안고 울던 아이가 용기 있게 기구를 탄 후, 마침내 누구보다 뿌듯하고 밝은 얼굴로 뛰어내리던 모습. 야외 대기 공간에 설치된 선풍기 앞에서 골고루 바람을 쐴 수 있도록 한 걸음씩 곁을 내어주던 사람들, 엄마 다리 뒤에 숨어 반쪽 얼굴로만 힐끗 경계심을 드러내다가 줄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마침내 손을 흔들어주던 아기까지. 시간 속에 머물며 나는 누군가 한 뼘 성장하고, 누군가는 선의를 베풀고, 또 누군가는 낯선 이와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놓쳤으면 참 억울할 뻔했던, 결코 찰나의 경험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따스한 장면들이었다. 그렇게 기다림을 누리고 나니, 놀이기구를 많이 못 타 아쉽지도, 대기하는 동안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촘촘히 채워진 내 시간들 안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소소한 행복감마저 느껴졌다.
그동안 시간의 효율을 따지느라 어쩌면 많은 과정들을 생략해 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많이 얻는 방법들을 좇느라, 돌아가거나 기다리는 것을 어리석다고 치부하면서. 삶은 점 같은 순간들의 연속임을 알면서도 점을 찍어나가는 과정보다 선을 완성하는 속도에 더 집중하곤 했다. 그 속에서 순간을 음미하는 능력, 주위를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를 잃어가고 있던 것은 아닌지. 실은 내게 주어진 어떤 시간도 버리거나 생략될 만한 것은 없다는 것,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돌아오는 길, 공항으로 향하는데 작은아이가 뾰로통하게 말을 건넸다. “근데 지난번에 올랜도 왔을 때는 휴게소에서 젤리도 사 먹고 차에서 노래도 많이 불렀잖아. 재밌었는데.” “차 오래 타느라 지루하지 않았어?” “그래도 그게 좋았어. 비행기 너무 금방이야. 힝!” “어! 얼른 녹음해야겠다, 나중에 차 탈 때 지루하다고 투정 부리지 않기!” 아이도 알게 된 것일까. 오랜 시간 꾹꾹 발자국을 남기며 한 점, 한 점 이어나갈 때 그 자리에서 더 많은 기억, 이야깃거리, 추억이 생겨난다는 것을. 금방 잊고 다리 아프다, 피곤하다 , 빨리 가자, 툴툴거릴 여섯 살이지만 천천히 시간 속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기를. 우리에게 오는 모든 순간을 오롯이 껴안을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삶을 음미하며 걸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