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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Nov 04. 2023

하루에 관하여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흔히들 말한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기, 명문 대학교에 입학하기, 멋진 결혼식 올리기 같은 것들에 목표를 두지 말라고. 이러한 것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언젠가는 끝나는 것들이다. 입사하고 입학하고 결혼하면 끝이 난다. 문제는 그 후다. 이루고 난 후엔, 무엇을 목표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직장에 입사한 후에 승진하여 임원이 되는 걸 목표로 둘 수 있고, 대학에 입한한 후에 좋은 성적을 얻거나 졸업 후 좋은 직장을 얻는 걸 목표로 할 수 있다. 멋진 결혼식 후에 내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그 자녀가 다시 명문 학교에 입학하는 걸 목표로 둘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마찬가지로 끝이 있는 목표들이다. 기한을 연장하고 또 다른 깃발을 꽂았을 뿐이다. 문자로 이해되는 이 말을 나는 알아들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그 말을 알아듣기 싫었기 때문이 아니라 목표 대신 삶의 뜻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배운 것이라곤 목표를 세우고 기한을 정한 뒤 계획을 수립하여 그 안에서 차곡차곡 실행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목표를 세우지 말라니. 갑자기 사지가 잘린 것 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이어령 선생은 공허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물독이 아닌 두레박 같은 사람'이 되라 가르친다. 물독과 두레박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보자. 물독은 물을 채우기 위해서 존재한다. 물이 차면 '끝난다'. 존재 이유에 목표가 있다. 반면 두레박의 경우는 물을 나르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물을 채우고 다시 물독에 부어 버린다. 채우고 버리는 과정 속에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에 끝이 없다. 이 비유 끝에 나의 존재는 어느 쪽인지 가늠해 본다. 사실 깊게 고민할 것도 없이 물독 쪽이다. 쪽이었다. 적어도 지난 30년 동안은 그렇게 살아왔다. 학창시절에는 다가오는 중간고사, 모의고사, 기말고사 그리고 수능을 목표로 살았다. 대학시절에는 취업을 목표로 살았고 첫 직장에서는 승진을 목표로 살았다. 마침내 내가 익숙한 목표지향의 삶을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매일 갈팡질팡했고 휘청거렸다. 때로는 방황하는 내 모습이 견디기 어려워 목표지향적인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후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의지결연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후퇴가 미래의 더 큰 방황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목표 지향적 삶을 버리고 길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이란 무엇일까. 단단하지 않은 길 위에서 떠돌기 시작한 지 3년째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그 길이란 무엇인지 아직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희미한 실루엣을 본다. 그건 큰 질문보단 작은 질문일 것이라는 사실. 인생이라는 커다란 시간의 덩어리이기 보단 하루, 매 순간이라는 작은 덩어리라는 사실임을. 나는 길에 목적을 두는 방법을 모른다. 방법을 몰라서 우선은 하루에 집중한다. 하루는 인생이라는 목적 속의 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스승이 그러셨나. 아니면 미치 엘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다가 생각한 것일 수 있다. 성취하고 싶은 부와 명예 말고, 살아가고 싶은 하루를 그려보라고. 그래서 그려봤다. 매일 새벽에 상쾌하고 미련 없이 깨어나는 하루를, 고요한 새벽 속에 글을 쓰는 나를, 활기찬 낮 시간에 사람들과 지혜의 정수를 끌어올리는 교류를 하는 일을, 힘에 부치는 오후에는 산책하고 노동하는 나를, 그리고 밤이 오면 어떠한 미련도 없이 잠에 빨려드는 내 모습을 말이다. 상상한 후엔 그러한 하루를 '지금 당장' 내 삶에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고 했다. 완벽한 구현은 불가능했지만, 약간의 변주를 통해 가능했다. 출근 전 충분히 이른 시간에 일어나 글을 쓰고 운동하기, 직장 속에서 또는 퇴근 후에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혜의 정수를 끌어올리며 말이다.



감사했다. 오늘도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겼게 일어났지만, 출근 전에 카페에서 마음에 울림을 주는 글을 읽고 영감을 받아 손가락 끝으로 활자를 터뜨리는 내 모습이. 감사했다. 직장 안팎에서 영감을 주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어떤 모임에서 나는 스승이고 어떤 모임에선 제자이다. 배우고(채우고) 가르친다(비운다). 교학상장의 선순환 속에 나는 이미 작은 두레박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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