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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Dec 04. 2023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프롬의 고찰




나에게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처음으로 확장해준 건 에리히 프롬이었다. 크리스천으로써 그것의 주체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 말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내가 깨닫지도 못할 때부터 '거기'에 늘 존재했다면, 지능을 갖춘 주체적 인간으로써 사랑에 대한 개념을 지적으로 확장시켜준 첫번째 공인은 도리 없이 에리히 프롬이다. 스물 다섯에 읽은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e>을 통해 나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연인과의 관계인 에로스Eros 에서 사람과 사람, 그러니까 하나의 인격체와 인격체의 관계로서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한 내적 성장의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점은 상대를 사랑하는 것 혹은 상대에게 사랑받는 것을 넘어, 그 사랑을 통해 내가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사랑이라니. 그런 관계를 선망하게 되었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한 상대를 만나고 싶다는 꿈도 꾸게 되었다.





<사랑의 기술>이 관계의 사랑을 일깨웠다면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삶을 향한 사랑을 일깨웠다고 할 수 있다. 살아감의 줄임말인 '삶'은 이미 단어 속에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삶은 결코 단편적일 수 없으며, 1년 혹은 10년이라는 덩어리로 존재할 수 없고 하루 매시간 매분 매초가 진주알처럼 모여여 마침내 진주목걸이가 되듯 엮여진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망각하고 만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미래의 연장선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순간에 매몰된다. 삶이 과정임을 기억해 낸다면 우리는 삶을 좀 더 다르게 관조할 수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거대한 질문이 '어떠한 과정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보다 구체적인 질문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체적 질문을 던져 마침내 삶을 향한 적극적 자세를 겸비할 때 우리는 마침내 삶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항상 성장을 향한 적극적 관심을 담고 있다. 삶이 과정임을 밝혔지만 그것이 올바른 과정이 되려면 성장을 향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삶의 모양이 마침내 성장을 향해 나침반을 세우고 그 과정의 한걸음을 내딛을 때 비로소 삶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며 우리의 적극적 참여가 내포되어야 함을 반증한다.



무기력에 빠져있을 때 나는 도무지 어떻게 헤어나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만 인식하고 있을 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혹자는 무기력한 시기도 있을 수 있다고 위로하겠다. 맞는 말이다. 내가 갈증을 느꼈던 부분은 무기력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증상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답답함, 증상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알 수 없다는 막연함으로 인한 두려움이었다. 무기력은 활동적이라는 개념과 반대되듯, 무기력한 상태는 수동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수동적passive 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고통당하다passio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일종의 고통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무기력할 때, 그러니까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구체적으로 현대인이 어떠한 함정 속에 빠져 있는지를 기술함으로써 나를 위로했다. 내가 겪는 상태가 '나'라는 독자적인 인격체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배경에서 야기된 보편적 현상임을 밝혀냈고, 그 과정에서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과 동일한 문제를 겪는 인격체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위로를 주었다. 내가 특히 공감을 느꼈던 공허함의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언젠가부터 좋은 인성도 팔아야 할 상품처럼 되었다는 사실, 나라는 존재 자체로서 인정하기보다 내가 만들어낸 퍼포먼스를 통해 나를 인정한다는 점, 공허가 아니라 고요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을 때에만 비로소 삶을 의미있게 살고 있다며 압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의사가 병인을 진단만하고 치료하지 않거나 처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듯, 그의 통찰이 현대인의 공허함을 진단하는 것에 그쳤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원인을 인지해야 원인을 제거하거나 변형시킴으로써 문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기력함을 느낌과 동시에 산만해졌다. 집중하지 못하고 차분하지 못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책을 읽지 못했고 글을 쓰지 못했고 클래식을 듣지 못했다. 대신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소비하고 즉흥적으로 감동을 주는 대중음악을 소비했다. 수년간 집중력과 사고력을 단련해 왔다고 착각한 스스로의 교만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기억력, 집중력, 상상력, 심사숙고 같은 정신적인 힘 역시 훈련해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정신적 훈련을 멈췄음을 깨달았다.





수년간 단련한 정신적 활동은 허무하리만큼 무기력 앞에서 무너졌다. 나는 프롬을 다시 찬찬히 살피고 뜯고 소화시키며 조금씩 치유했다. 정확히는 삶을 향한 사랑을 치유했다. 삶을 향한 나의 태도를 진단하고, 정신적 훈련이 중단된 상태를 인지했고, 그의 철학과 함께 점진적으로 정신적 훈련을 시작하며 삶을 향한 수동적 자세에서 적극적 자세로 조금씩 조정했다. 마침내 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다고 느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삶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사실 에리히 프롬은 삶을 사랑하는 비법은 없다고 정확하게 밝힌다. 다만 비법 대신 우리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삶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표현한 건 사실 성장하고 싶은 마음과 그 과정이 기대되는 마음을 치환해서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고백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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