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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Dec 13. 2023

자기소개 part.2





지난 자기소개 글을 쓰고 몇 번이고 되뇌어 읽어 보았다. '소개'라는 단어에는 화자와 청자라는 두 주체의 존재가 암시되어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소개의 화자는 분명 나인데 그렇다면 청자는 독자일까? 처음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번이고 자기소개를 다시 읽고 나서 마침내 깨닫게 된다. 자기소개의 주요 청자는 스스로라는 것을. 자기소개 글을 쓴다는 건 나에게 말을 걸어보려는 시도다.



삶이 복잡할 때, 해야 할 일 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하듯 나의 자기소개는 좋아하는 것들보다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먼저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이 이 지점에 미치자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을 추가하기보다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먼저 일상에서 제거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보다 기꺼이 거리를 둬야 할 사람들을 멀리함으로써 삶을 정돈해 보려는 시도랄까.



나는 대중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음악을 애써 귀담아들으려는 노력 없이 쉬운 선율이 주를 이루는 음악을 싫어한다. 동시에 대중음악을 좋아한다. 올해는 Charlie Puth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 기승전결 스토리 라인이 있고 수십 분을 기다려야 마침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 대신 대중음악을 찾는다는 건, 나의 인내심이 약해졌다는 반증이다. 어쩌면 나는 대중음악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기 보다 대중음악을 찾는 인내심이 약한 내 상태를 싫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격이 없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가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고, 또 크리에이터가 되는 시대이지만 이 세상에는 자격 없는 책이 지나치게 많다. 나에게 책이라는 건 작가가 특정 분야에 대해서 오랜 시간 동안 끈질기게 고민하고 깨어지고 체험한 것을 마침내 지혜라는 정수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래서 책은 무겁다. 무거워야 한다. 책이 나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책에는 한 사람과 인생이라는 묵직함이 담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책을 쓰지 못한다. 어쩌면 책을 쓰지 못하는 변명을 찾은 것일 수도 있다. 요즘엔 가벼운 책이 많다. 가벼운 글도 마침내 책의 영역에 집어넣고 싶다면 나는 책(冊) 대신 다른 이름을 제안하고 싶다. 이를테면 편지를 엮은 서한집이라는 단어처럼 '문장집'과 같은 단어로.



나는 강약약강을 좋아하지 않는다. 강한 사람에게 약해지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태도를 드러내는 이를 싫어한다. 그래서 나는 아랫사람에게 후하고 윗사람에게 잔인할 만큼 냉정한 편이다. 아랫사람이 실수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여겨 가르치고 다시 기회를 준다. 반면 윗사람이 실수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면 그가 한낯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내 마음속에서 그의 지위를 격하시킨다. 강한 사람, 그러니까 윗사람이 더 강한 사람에게 약해지고 아랫사람에게 강해진다면 환상의 콤비다. 극단적으로 그런 사람은 나에게 인간의 범주에서 영원히 제외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강강약약을 추구한다. 완벽하진 않을 수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이 가치를 행동으로 지켜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 내적 싸움을 건다.



내가 내적 싸움을 거는 영역이 한 가지 더 있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가까운 사람, 소중한 사람에게 푸는 것이다. 지금보다 한참 미숙했던 시절부터 가장 통제하기 어려웠던 영역이기도 하고 수없이 실패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화풀이로 풀 때가 있다. 하나의 인격체와 또 다른 인격체가 엮어가는 관계의 측면에서 가장 주의하고 싶은 부분이다. 이따금 미숙함으로 인해 외부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까운 이에게 표출했을 때, 나는 좌절한다. 아직 견고하게 단련되지 않은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동시에 다시 한번 다짐한다. 언젠가 이 미숙함을 완전하게 내 삶에서 추방하겠다고. 모든 사람에게 다정할 순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있는 힘껏 다정하고 싶다.



나는 시간을 남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간 역시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른다. 흔히 말하는 킬링타임killing time 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데, 애초에 킬링killing 할 시간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기 시간을 남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간 역시 하찮은 것으로 여겨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던지, 자기 멋대로 계획을 변경하여 상대방의 시간을 소모시킨다. 어떤 사람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시간 약속을 지키는 상대방의 태도로 일차적인 판단을 내린다. 다른 맥락에서 시간을 오용하는 것에는 약간의 의문이 남아있다. 시간의 남용, 그러니까 시간을 함부로 대하고 무자비하게 소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오용의 측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지금 내가 어떤 일에 시간을 쏟는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잘못된 사용일까 하는 질문에 대답을 주기까지 시간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의 오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내가 정답이라는 생각은 없다. '무엇이든 경험하면 좋다'라는 말을 이십 대만큼 좋아하진 않지만, 여전히 맞는 말이라고 여긴다.



마지막으로 나는 부정적인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싫어하는) 것'을 나열하는 모든 문단의 첫 문장에 '~를 싫어한다' 대신 '~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쓴 것을 눈치챘는가? 나는 의식적으로 부정적인 단어를 피한다. 그것이 입술을 통한 발화이든 텍스트를 통한 문장이든 마찬가지이다. 내면에 피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통제할 순 없지만 그것이 내 손가락 혹은 입술을 통해 표출되는 것은 통제할 수 있다. 나는 그것들이 내 육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마침내 그것들의 존재를 소멸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자주 '실패'한다.



부정적인 단어를 대체로 싫어하지만 유일하게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실패'다. 어릴수록 두려웠던 것은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 나이가 들어 삼십 대가 되어도 여전히 실수하고 실패하는 일은 두렵지만 이제는 걸어가고 달려가기 전에 넘어지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함을 알 만큼 노련해졌다. 요즘은 넘어지는 법을 배우고 도전했다가 실패할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반복적인 실패를 하는 나에게 신물이 날 때도 있지만 지나간 모든 실패를 잊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배운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새로운 꿈을 꾸고, 이 땅에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소명을 위해 나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시편에서 말했다. 내가 넘어질지라도 아주 엎드리지 않을 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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