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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Oct 30. 2023

예술, 글쓰기 그리고 스승

A Light Inside



나에게 처음으로 영감을 준 스승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이었다. 지금은 스승의 이름도, 또렷한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나에게 주었던 특별한 느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승은 나를 특별히 여겼던 것 같다. 혹은 그런 느낌을 가지도록 나를 대했다. 어쨌든 수십 명의 급우를 담당하는 담임 선생님이 한 사람인 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아니 느낌은 어린 나에게 많은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남들 앞에 서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며 상상만으로도 심장 박동수가 오른다. 하지만 발탁된 열 두살의 어린 자아에겐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믿음의 씨앗이 작게 생성되어 있었다. 나는 갑자기 급우를 진두지휘하는 사람이 되었다. 교실에서 대장부처럼 구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내가 잘 하는 분야, 그러니까 당시에는 그것이 음악이었는데 음악시간에 단체로 부를 곡을 통솔하는 악장이 된 것이다. 나는 피아노를 칠줄 알았고 악보를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교회와 학교 음악시간에 노래를 지휘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눈대중으로 보아둔 것이 있었다. 나는 반주자를 임명했고, 부를 노래를 선곡함과 동시에 후렴구를 몇 번 반복할지, 몇 곡을 부를지와 같이 모든 것을 선택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내가 반장이 되거나 음악 선생님이 되거나 무언가 특별한 지위가 생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급우들이 내 말을 따랐다는 점이다. 반주자 옆에 앉아 후렴구로 돌아가도록 명령하며 목소리를 힘껏 지를 때, 내 마음 속에는 학급우들이 거부할 것을 염려하는 작은 공포가 있었으나 그 공포는 실제로 발현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특별한 초등학교 5학년을 보냈다.


서른 한 살이 된 지금도 이십여년 가까이 된 당시의 일을 떠올린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다. 열두 살의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열한 살까지 내 안에 있던 욕구가 열두 살에 발현된 것일까, 아니면 열두 살의 사건이 그 이후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일까.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는 특별해지기를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특별함이 잘 실현되지는 못했는데, 그 욕구가 발현될 수 있는 기회가 열두 살에 생겼다. 그 느낌은 생각 이상으로 짜릿했다.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 특별한 사람이 되는 느낌은 아주 좋군!' 이 느낌을 이어가기 위해 열세살에도,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심지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나는 배울 때, 배움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승에게 인정받는 것을 즐긴다. 양쪽이 모두 중요하다. 배움을 통해 나 스스로 성장을 하고 있다고 깨달을 때도 도파민이 나오지만,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나의 성장을 인정할 때 역시 짜릿한 도파민이 터져 나온다. 이 두가지 측면은 두 다리가 알맞게 지탱하고 있는 표지판과 같아서, 한쪽이 짧거나 약해지면 곧바로 휘청인다. 나 스스로는 성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데 스승이 칭찬하면 괴리감이 생길 것이고, 나는 성장했다고 느끼지만 스승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배움에 대한 열망을 타고나는 것도 축복이지만 적절한 시기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 역시 큰 축복인 이유다.


하버드 법대 석지영 교수 역시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스승의 중요성을 공감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 발레에 대한 열망이 컸고 재능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결단으로 발레를 중단해야 했다. 그때부터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어린 그녀는 수업도 무엇도 열정을 발휘하지 못했다. 처음엔 그저 슬프기만 했고, 나중엔 그런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마침내 그녀가 이러한 처지에서 스스로를 구하고 싶다고 느낄 때 적절한 스승이 나타나 그녀에게 특별한 아이라고 칭해 주었다. 사십 대가 넘은 그녀의 인생엔 수많은 훌륭한 스승들이 있었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에 만난 그 스승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녀는 다시 배우는 기쁨을 알았다. 발레, 피아노, 도서관에서의 무한적인 독서 그리고 학교에서의 학습까지 기쁨을 맛보았다. 대학에서 프랑스 학문을 전공하고 마침내 하버드 법대에서 법의 매력에 빠질 때까지 그녀의 인생 기저에는 꾸준히 그러나 확실하게  배움에 대한 기쁨이 있었고, 시기적절하게 나타나 그녀를 올바르게 지도한 스승들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얻게 된 행운에 대하여도 언급한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해 나가며 재정적인 고민없이 공부할 수 없는 사람도 많으니까. 한 사람의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생을 획일화하여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녀의 인생은 좋은 스승을 만나서 배움의 기쁨을 깨닫고 궁극적으로는 본인 역시 가르치는 스승이 되는 것으로 요약된다.

물론 직전의 문장에는 많은 사건과 과정 그리고 등장인물이 생략되어 있다. 스승만나기, 배움의 기쁨 그리고 스승이 되는 세 가지 과정 중에서 두번째 배움의 기쁨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배움의 과정, 발견과 기쁨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가 내 마음에 더 와닿았던 이유는 글쓰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글쓰기란 배움의 결과가 아니라 배움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흔히 어떤 지식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지식에 관해 글을 써볼 때 그에 관련한 나의 논리 혹은 근거가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게 된다. 글을 쓰며 발견한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더 학습하고 탐구한다. 글쓰기가 배움의 과정인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여느 지식과 마찬가지로 글쓰기가 배움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점을 '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일 꾸준하게 배움을 실천하는 끈기다. 석지영 교수 역시 학생이던 시절에도, 그리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지금도 여전히 배움 속에 있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글쓰기에 대하여 꾸준히 설파한다. 그녀가 보다 젊었던 10대와 20대 시절에는 글을 잘 쓰는 것과 글의 소재 자체에 대해 고민했다면 좀 더 성숙해진 후에는 글쓰기를 꾸준히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 조금씩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커다란 기대를 내려 놓고 매일 담백한 상태로 글쓰기 앞에 당당하게 마주하는 것이다. 그럼 한 달 안에 한 챕터를 쓰게 되고 아홉 달이 되면 마침내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마치 배움과 글쓰기를 인내와 끈기를 갈고 닦는 고행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 기저에 스승과 배움이 밑바탕 되어 있다면 그보다 한층 더 깊은 곳, 그러니까 그녀 인생의 중심에는 자유와 즐거움이 있다.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가 고행이 아니라 기쁨인 이유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선물받은 가장 큰 선물이 자유였다고 고백한다. 자유가 있었기에 선택한 것, 배워온 것과 모든 경험들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나 내면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한다. 업무, 사업, 과학, 예술, 배우고 가르치는 것, 그리고 양육하는 것까지. 우리는 이런 분야들에서 탁월해지고 싶어 한다. 탁월함은 능숙함과 멀지 않다. 이 둘의 공통점은 건너뛸 수 없는 절대적인 시간과 노력의 투입량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완독한 그녀의 이야기를 왜 세 번째로 재독하고 싶어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나는 조급했다. 얼마 전부터 사회에 나온 8년이 넘은 시간 동안 내가 축적해온 것들과 그것들의 결과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조급했다. 분명히 책과 배움, 예술과 여행, 일하는 것과 선배가 되는 것 모두 충분히 즐기며 행복했던 나였는데, 만족감과 달리 성적표가 부진하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이것도 저것도 집중하지 못했고, 못마땅한 채로 조바심을 내다가 결국엔 이 현상을 '번아웃'이라는 편리한 딱지를 붙이고 동시에 손에서 놓아버렸다. 조급한 상태로는 어떤 것을 시도해도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없었다. 나는 내 안에 있던 자유와 즐거움을 스스로 빼앗음으로써 내 안의 가장 핵심이었던 자유와 즐거움이라는 주춧돌을 빼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명예도 부도, 인정도 관계도 아니다. 이건 모두 결과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이었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던 자유와 즐거움이었다.


우리에겐 탁월해지기 위해서 혹은 능숙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인 총량이 있다. 자유와 즐거움이라는 중심을 다시 내 삶에 세우고 이 총량을 채우기 위해 하루를 쌓아간다. 조금씩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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