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던 책정리를 했다. 그런데 간밤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11시 경, 인터폰이 울린다. 경비실에서는 아래 세대에서 민원이 들어왔다고 했다. 책을 바닥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소음이 생겼나보다 싶었다. 책정리를 중단하고 드레스룸에 들어가 얌전히 앉아 빨래를 개었다. 얼마 후 인터폰이 다시 울린다. 층간소음이 계속된다는 민원이 다시 접수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드레스룸에서 옷을 개고 있었고, 오빠는 서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TV나 음악 같은 오디오 소음도 없고 딱히 움직임도 없었는데 또 소음이라니?
내가 이사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무렵, 평일 대낮에 엄마와 함께 짐을 나르다가 아랫세대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다.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는 내가 누르는 층수를 보고는 우리를 인지했다. 나는 밝게 인사했는데 그분은 인사를 받아주는 대신 이사하실 거면 소음나지 않도록 조심히 해달라고 답했다. 초면에 대뜸 그런 말을 하는 것에 기분이 상한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민원이 들어오니 지나치게 예민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상해버렸다.
중간에서 경비아저씨도 난감하신 것 같아 아래 세대와 직접 대화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스스로의 욱한 면을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래 세대를 대면하기 전에 오빠에게 말했다. “우리 큰소리 내지 말고 잘 이야기하자~” 사실 이건 오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부부가 같이 올라 왔는데, 아내 분이 선택하는 단어가 다소 극단적이었다. 감정이 격해져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쳤다. 그때마다 옆에 계신 남편께서 “그렇게 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라고 말하며 몇 번 중재해주지 않으셨다면 나도 덩달아 감정이 올라갔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에서의 가해자는 우리 커플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들었다. 그리고 그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 쏟아냈을 즈음 오빠가 말했다. “저희가 더 조심할게요. 안 그럴려고 신경쓰긴 했는데, 더 조심할게요.” 표정관리는 했지만 내 마음속 얼굴은 눈이 왕눈이만큼 커졌다. 오빠의 차분한 사과에, 그리고 아래 세대 남편 분의 “낮에는 어쩔 수 없는 거 저희도 알죠. 밤에만 신경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는 말에, 나도 감정 보단 아래 세대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가만히 옆에 있던 나도 “밤에 더 신경쓸게요. 죄송해요.”하고 사과하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앞으로 이 집에 몇 년을 더 살텐데, 내 집에서도 항상 노심초사하며 또 아랫집에서 불편해하고 있을지 신경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랫집 부부의 말에 의하면 오늘 밤 뿐만 아니라 늘 발망치 소리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을 결국 우리집으로 올라오게 만든 건 오늘 나의 책장정리 때문이었다. 내가 책장정리를 할 때, 오빠는 계속해서 말했다. “혼자 고생하지 말고 내일 나랑 같이 정리하자.” 하지만 여간 고집불통이 아닌 나는 탄력 받을 때 해야 한다며 혼자 해도 재밌다며 계속 정리를 했다. 트리거가 내 행동이었다. 사실 야밤에 이런 소란이 있었으니 오빠라고 마음이 좋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오빠는 나한테 핀잔 한마디 없었다. 나는 괜히 마음이 찔려 내 잘못이라고 시인하지도 못했다.
아랫집 부부가 돌아가고 우리도 금새 지쳐버려 잘 준비를 했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미안해.” 무엇이 미안한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구태여 보태지 않았다. 사과하면서도 남아 있는 얄팍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오빠는 안아주며 말했다. “맘 상하지 말고 맘 편하게 자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막 주니어 딱지를 뗄 즈음이었다. 조직에서 성공하고 싶었던 나는 상사나 동료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면서도 그 스트레스를 종종 가까운 사람들에게 표출하곤 했다. 어느 순간 이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인지하고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 마음속엔 ‘나만의 가치체계’가 있는데 상위에는 언제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회사와 관련된 건 언제나 그 아래에 있다. 그 이후로 나는 가족과 회사가 충돌할 때, 언제나 가족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력일 뿐, 미래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돌 때 새로 맞이할 가족을, 그러니까 지금까진 완벽하게 타인이었던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마음 깊이 인지하여 이 가치관을 유지할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외부 환경으로 인해 연출된 스트레스 상황에서 그 여파가 가정으로 침입하지 않도록 방어할 수 있을까.
층간소음 컴플레인 문제를 계기로 만약 오빠가 나에게 원망의 말을 했더라면, 혹은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우리는 진 것이고 실패한 것이다. 아래 세대가 아니라 우리의 가치체계로부터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 오빠는 나를 나무라지 않고 아래 세대에게 사과함으로써 성숙하게 승리했다.
오빠의 말 덕분에 편안하게 잠든 나는, 잠들 때의 마음과는 반대로 눈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열어 ‘층간 소음’을 검색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갈등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으니까. “뭐 봐?” 자다 깬 오빠가 스마트폰에서 열심히 스크롤을 내리고 있는 나를 향해 물어본다. “층간소음..”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빠는 내가 스마트폰을 볼 수 없도록 안아주었다. “고마워. 오빠가 최고야.” 내가 말했다.
잠이 다 깨어버린 나는 부엌에 나와 차를 내리며 생각했다. 비록 내가 완전하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윗세대이고 우리가 만들어낸 소음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할지 혹은 아랫세대에서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역시 우리의 윗세대가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고 있어 쿵쿵쿵 하는 층간 소음을 겪고 있지만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참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소음이 참지 못할 수준일 수도 있는 거니까. 어쨌든 아랫세대에서 조심해달라고 대면 호소까지 하였으니 우리도 경각심을 갖고 조심해야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준법시민이니까.
이내 기상한 오빠와 테이블에 앉아 커피와 빵을 먹으며 앞으로 우리가 좀 더 조심하고 신경쓰자는 다짐을 했다. 오빠는 책을 읽는 중에 자비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언제나처럼 함박 웃음 얼굴로 “그러자”하고 대답했다.
이 사람을 더욱 존경하게 된 것 같다.
PS. 몇 달 후 발망치 층간 소음의 원인이 우리 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