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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Nov 14. 2024

#19 청첩장 문구

24. 5. 31



Ever thine,
Ever mine,
Ever ours.

언제까지나 당신의,
언제까지나 나만의,
언제까지나 우리의.





유명한 베토벤의 러브레터 문구이다. ‘언젠가 결혼을 하면 청첩장 문구는 이걸로 해야지!’하고 다짐한 적은 없지만, 짧고 간결한 길이, 음운의 리듬감, 로맨틱한 의미에 반하여 마음 속에 각인된 문장이다. 나에겐 에로스적 사랑에 관하여 말할 때 자주 참고하는 문장들이 있다. 베토벤의 러브레터도 그중 하나이고,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나 파비오 볼로의 소설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청첩장 문구가 에로스적 사랑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지체 없이 떠오른 문구는 베토벤의 러브레터 문구였다. 문제는 인터넷으로 청첩장 시안을 찾아보는데 머지 않아 베토벤의 문구를 사용한 청첩장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남들이 보기에 다 같아 보일지라도 나에게 의미가 있고, 나만은 조금 특별했으면 좋겠는 것이 연약한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나는 ‘나만의’ 베토벤 러브레터가, 이토록 쉽게 발견되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 속에서 조용히 해당 문구를 포기했다.



그때부터 나의 청첩장 문구 정하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책장에서 지난 십여년 동안 읽었던 책들과 그곳에 무자비하게 붙여진 인덱스를 모두 읽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시집부터 시작해서, 에세이, 고전소설까지 사랑에 관한 문구가 있을 만한 책은 모조리 꺼냈다. 후보 문구를 몇 가지 받아적긴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청첩장 문구 쯤이야 결혼 준비 과정에서 결정해야 하는 수백가지의 목록 중에서 중요도가 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청첩장이 중요했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하고 선택할 수 없었다.



베토벤의 러브레터 문구처럼 몇 마디 문장 만으로도 나에게 의미가 깊고 또 결혼에 대한 우리의 다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문장이 없을까 생각했다. 나는 활자중독자이자 문장 수집가다. 그렇다면 내가 지난 세월동안 수집한 활자들은 어디에 있지? 종이책에만 있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올린 건 블로그다. 10년째 나의 생각들을 기록하고 있는 블로그라는 공간이라면, 내가 미처 책에 표시하지 못한 문장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 그리고 머지 않아 하나의 글을 발견했다.



Dear beloved. We are gathered here today to witness the marriage of two people who are not meant to be. (중략) They are here today, not because they are meant to be, but because they chose each other. (중략) That is not destiny. That is not fate. That’s commitment. For richer, for poorer, in sickness and in health, through stormy days and sunny skies, they have earned their happy ending.



 문장을 조용히 후보 문구로 받아 적었다. 처음엔 확신이 없었지만, 문장을 곱씹고 곱씹을수록 이보다 더 완전한 문장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우리의 사랑에 관한 예찬이 아니라, 우리가 일궈갈 결혼 생활에 관한 다짐이었다. 결혼식은 영혼의 단짝을 찾기 위한 여정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챕터의 시작임을 상기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앞서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유일한’ 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로맨스를 좋아하지만 결혼은 삶이고 삶은 현실이라는 점을 매일 기억한다. 연애는 응석을 받아주고 때때로 연인의 비논리를 수용하지만, 결혼은 배려이고 포용이며 헌신이라는 점을 기억한다. 결혼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을 투영했을 때 이보다 더 적합하고 완전한 글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나는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쓰는 인간인 나는 이 문장에 약간의 한국어식 번역을 더해 아래와 같이 수정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운명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운명도 인연도 아닌,
헌신의 언약입니다.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비 오는 날에도 맑은 날에도
언제나 함께할 것을 약속합니다.

                    




PS. 참, 청첩장에는 파리에서 찍은 사진을 커다랗게 넣을 생각이다. 포토 청첩장을 한다는 이야기에 친구가 정말이지 나답다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직 청첩장 문구도 못 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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