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현장중심디자인
매번 찾아오는 막막함..
조경가로 살아오면서 이제껏 셀 수 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건만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설계를 위해 텅 빈 도면을 마주할 때면 내색은 안 해도 매번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막막한 생각이 드는 건 아직도 신입때와 변함이 없다. 서툴었던 주니어 시절에는 이름도 모르는 노랑머리 조경작가의 그림? 책이나 아님 손가락만 까딱해도 쫘르르 쏟아져내리는 인터넷의 여러 레퍼런스 이미지를 보며 흉내내기 일쑤였고 대개 그딴식의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에게 가기도 전에 회사 내 선배들이나 소장님들을 통해 거의 대부분 ‘자동폐기’되곤 했다.
공감을 얻어가는 법..
그렇게 젊은 열정만으로 내 디자인을 알아주지 않는 이 세상을 탓하며 울분에 차 있었던 나는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국 내 디자인을 세상에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선 도면 속 화려한 스케치도 오색 찬란한 cg나 동영상도 아닌 이 디자인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공감’을 얻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단지 깨달았을 뿐 한낱 조경가가 돈을 받고 일하는 서비스 용역자의 지위로 일면식도 없던 그 이해관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을 이끌어내기란 더욱 막막한 일이었다.
사건은 회의실에서 일어나지 않아! 현장에서 일어난다!
한국의 수사반장 격인 일본 형사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의 이 명대사는 비단 현장에서 증거를 찾고 범인을 찾아내는 형사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것이다. 우리처럼 매번 처음 보는 외부 공간을 디자인하는 조경가에게 이런 능동적인 현장중심형 사고는 디자인을 기획하고 발전시키는데 그리고 그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되어준다.
이유 있는 디자인
현장을 동기로.. 근거로 한 디자인 프로세스는 최소한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뜬구름 잡는 얘기는 안 할 테니깐 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조경가는 최소한 주어진 설계조건으로 공간의 용도에 현장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서 장점을 유지하고 단점을 보완한 소박한? 디자인정도 제안하면 그만아닐까?
게다가 내가 설계를 시작했던 근 20년 전만 해도 언어유희 가득한 유치 찬란 네이밍이나 아무도 이해 못 할 허무맹랑한 컨셉으로도 클라이언트를 쉽게 현혹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같이 장식적인 겉치레보단 실용성과 실효성, 효율성의 가치를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선 현장에 근거한 ‘이유 있는 디자인’이 더욱 클라이언트에게 공감을 얻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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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를 떠나 처음 맞는 막막함? 에서 디자이너가 자신의 무릎을 찰지게 내리치며 확신! 을 갖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 그것이 바로 비록 며칠 남지 않은 빠듯한 마감 일정에 왕복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먼 거리에 있는 곳이라도 내가 현장을 꼭 가보려고 하는 이유이다.
아늑하고 쾌적한 사무실 책상 위에서 랜선 여행을 즐기며 100시간을 고민한 것보다 그 10시간의 가치는 언제나 내게 값진 결과를 가져왔다. 몸소 보고 느낀 현장의 정보는 도면이나 항공사진에서는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 속 5감의 경험을 더한 디자이너에게 확신에 찬 결정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현장중심의 이유 있는 디자인은 대개 적게든 많든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움직이기 마련이고 최단 기간에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