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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ekly hoonyeon Jan 15. 2023

낯선 디자인과 조경가의 몫

02. 도면으로 말하기

화가가 펼치는 예술 세계의 이상은 그가 그려낸 캔버스를 통해 세상에 말을 한다. 작가가 글을 쓰고, 뮤지션이 악보를 쓰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내는 공간 설계자인 조경가는 화가에게 캔버스가 있듯 열정이 담긴 도면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세상에 제 아무리 좋은 디자인이라 하더라도 시공을 위한 상세한 정보를 가진 도면이 없다면 온전하게 실현될 수 없듯 설계자는 자신의 디자인을 도면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조금의 비약을 더한다면 아마추어와 프로 조경가의 차이는 기획한 디자인을 현실적인 도면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한 cg와 아무도 이해 못 할 다이아그램만으로는 조경가는 세상과 소통할 수 없고 침묵할 뿐이다.


온전한 조경가가 되는 3가지 단계

1. 조경가로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기본구상을 하는 단계에서 내가 직접 만족스럽게 그려낸 근사한 스케치를 보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낸 기분에 흐뭇하기 그지없다.(스케치의 성격은 종이에 펜으로 그려낸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2. 그려낸 스케치가 큰 왜곡 없이 현실성과 경제성을 가진 냉철한 정보로 무장한 도면으로 탄생하게 되면 설계자는 마치 그 옛날 첫눈에 반한 연인을 본 듯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3. 마지막으로 도면이 세상에 실제로 새겨져 설계자의 의도대로 이용자들을 통해 작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오랫동안 숨겨왔던 제 마음을 들킨 듯 코끝이 시큰한 감정과 함께 그제야 그는 온전한 조경가가 된다.


단순하게 구분한 이 세 가지의 단계에서 1~2는 조경가의 ‘몫’ 3은 조경가의 ‘복福‘이 된다. 다시 말해 디자인을 기획하고 도면으로 만들어내는 것까지가 오롯한 조경가의 의무임을 뜻한다. 간혹 제대로 도면도 그려내지 못한 조경가가 시공된 결과물을 보고 시공사나 발주처를 탓하는 볼멘소리를 들으면 같은 조경가로서 너무 창피한 생각이 든다.




낯선 디자인 이야기

수년 전 어느 지방에 새로 짓는 대학교의 설계를 한 적이 있었다. 그중 내가 맡은 공간은 건물사이 약 6미터 단차가 나는 경사지 디자인이었는데 이곳은 일반 건축물과는 달리 젊은 학생들이 활발하게 사용하는 캠퍼스의 외부공간이어서 경사지를 단순히 계단이나 슬로프를 만들어 낙차를 극복하는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고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통행하고 무엇보다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했다.      

초기 지형스케치

꼭 필요한 만큼의 너비를 가진 계단을 중심으로 기분 좋게 걸어 내려올 수 있는 경사로와 함께 최대한 많은 가용지를 만들기 위한 옹벽을 클래이를 이용하여 3D Sketch를 진행하였고 어느 정도 디자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는 내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처음 이 지형의 개략적인 초반 스케치를 마치자 지나가던 우리 팀 부서장이 이 작업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다른 사람이 볼까 두렵다며 종이로 덮어 책장 위에 올려놓았다. 의아한 나는 이유를 물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들었다. 너무 컨셉적이여서 실현가능성이 어려워 보이며 자칫 회사 경영진들에게 비싼 월급 받고 일과시간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는 암묵적인 이유였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보통의 평면적 사고와 스케치에 익숙한 설계자들은 이런 자극적인 스케치가 처음엔 부담스럽고 괴팍스럽게 보이기 마련이고 또 이런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에게 설득하기도 어렵고 설득하더라도 도면화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여긴다. 그런 이유에서 아마도 그 부서장은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30대 초반의 철없는 조경가의 이 낯선 스케치를 과한 열정이 부른 참사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차이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가치판단의 왜곡은 시공단계에서 더욱 많이 나타난다.


적의의 조경가


낯선 디자인을 하는 낯선 조경가였던 나는 유독 시공현장에서 감리자들과 얼굴을 붉히며 의견충돌을 한 적이 많았다. 대개의 경우 오랜 현장경험을 가진 감리자들이 수없이 반복해서 얻은 익숙한 것과 새파랗게 어린 조경가가 만들어온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왜곡된 판단 때문이었다. 젊은 혈기에 나이 지긋한 감리자가 ‘내가 해봤는데 안된다’고 말하면 나는 ‘당신이니깐 못한 거’라고 매번 비아냥거리며 응수했다.

발전된 스케치

고집스러운 집착의 결과였던지 이 낯선 디자인은 결국 회사나 클라이언트의 큰 지지와 호응을 받으며 최종 기본계획으로 확정되었다.


낯선 좋은 가치

공간의 완성은 이용자의 행태를 통해 완성된다. 6미터의 경사지가 단순히 낙차를 극복하며 이동하는 길이 아닌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며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머무는 공간임을 3D Sketch를 발전시켜 모형으로 생생하게 증명을 하고서야 얻은 업적이었다. 낯설더라도 좋은 가치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이로서 1의 단계가 완성되었다.

완성된 평면도

낯선 디자인은 그에 맞는 낯선 방식의 작도 프로세스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고 그 낯선 방식이 매번 까다롭고 어려운 과정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리고 낯선 것도 오래 지나지 않아 곧 익숙한 것이 된다.


계획안은 지형 조작에 대한 레벨, 치수, 경사도와 각종 인프라를 설치의 규모 산정을 위해 치밀한 정지계획을 반영한 도면으로 발전된다. 우선 스케치된 모형을 직접 손으로 만져가며 필요한 정보를 읽고 2D형식의 도면화를 위한 개략의 지형을 등고선을 그려내고 더 상세한 계획은 작도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자유분방한 3D 지형 디자인을 저차원인 2D 형태의 정보로 변환해야 하는 과정이 처음엔 번거롭고 더디지만 노력한 만큼 설계자가 느끼는 보람도 크다.   

조경가의 몫

오토캐드의 그리기 툴 중 마치 손으로 그려 넣은 듯한 부드러운 곡선을 작도할 수 있는 스플라인 spline이 있는데 디자이너가 그려낸 따끈따끈한 Sketch를 가장 맛깔나게 도면에 구현할 수 있는 도구이다. 더 상세하고 복잡한 지형 설계는 라이노 같은 3D프로그램에서 정밀하게 모델링한후 등고선을 추출해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공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되는 공사계획평면도가 그려지면 이미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고, 그밖에 각종 단면이나 디테일 도면들이 더해져 시공을 위한 온전한 정보가 담긴 도면으로 완성되며 2단계가 조경가의 ‘몫’인 2단계가 끝이 난다.


이제야 조경가는 ‘낯선 디자인’이었어도 자신의 디자인을 세상에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3번째 단계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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