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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ekly hoonyeon Feb 05. 2023

가능성의 담는 그릇.. 취향의 정원#2

공터예찬_조치원1927


추억 속 공터


1980년대 서울 한복판 내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를 다닐 적만 해도 살던 동네 주변에는 공터가 많았다. 당시 우리 집은 3층짜리 연립주택 단지였는데 요즘엔 그 흔해빠진 알록달록 색으로 치장된 놀이터도 인터넷, 유튜브도 없던 시절.. 방과 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딱히 할 일이 없던 아이들은 누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몸집만 한 가방째로 하나둘씩 공터로 모여들었다. 말 그대로 그냥 먼지 풀풀 나는 공터_비어진 공간일 뿐이지만 학교에선 선생님눈치 집에선 부모님의 잔소리와 억압을 피해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소탈한 일탈을 즐길 수 있는 자유해방지대였다.

진입광장


팽창하는 도심 속 쉼표
조치원1927


최근 세종시의 도시계획 연구에 팔자에도 없던 연구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2주에 한 번씩은 회의차 세종시에 방문하는데 보통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회의를 위해 매번 왕복 4시간을 운전하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세종시 근처의 가볼 만한 장소들을 찾아 둘러보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처음 방문한 곳이 작년에 개관한 ‘조치원1927‘이다.


호젓한 시골길을 달려 읍내의 시끌 법석한 시골시장을 지나고 나니 옹기종기 낮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오래된 주택가에 들어섰다. 핸드폰의 네비게이션은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음을 알리는데 편견이 있었던 건지 처음부터 이런 밀도 높은 주택가를 기대하지 못했기에 잠시 어리둥절한 마음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사전에 별다른 정보 없이 옛 한림제지 공장으로 쓰던 건물을 세종시에서 사들여 2022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조성 했다는 기사를 읽고 방문한 터라 편협한 생각에 오래된 산업단지 속 핏빛 짙게 녹슨 스산한 브라운필드brown_field를 기대했었나 보다.


조경가의 호사


그리 높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건물들로 빼곡히 찬 도심 속.. 마치 커다란 밥 숟가락으로 마음껏 아이스크림을 퍼낸 듯 움푹 비워진 조치원1927의 진입광장을 조우한다. 아니나 다를까 딱 봐도 오래돼 보이는 옛 공장의 녹슨 흔적들을 발견하니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여유롭게 주차를 하고 습관처럼 뒷짐을 진채 건물 주변을 먼저 둘러본다.


한적한 평일 오후.. 북적거리는 서울도심을 벗어나 지방의 어느 주택가에서 따스한 겨울 볕과 함께 여유로운 산책을 하고 있으니.. 같은 시간 사무실 모니터 앞에서 플라스틱 마우스를 연신 두들기며 일하고 있을 동료들이 떠오른다. 설계자라는 직업을 핑계로 매번 틈만 나면 일삼는 이 농땡이?는 조경가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큰 호사이다.


좋든 아니든 간에 여러 장소들을 경험하고 영감을 얻는 일은 공간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디자이너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좋은 기획과 디자인은 대개 책상 앞이 아닌 현장에서 창조되기 때문이며 모니터 디스플레이에 주사된 이미지들은 현장에서 사람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지각과는 무척 구별되기 때문이다.


조경가의 목적물은 공간과 장소이지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니지 않은가..?


장식적인 장소성 vs 작동하는 장소성


언제부턴가 옛 건물을 활용한 도심재생프로젝트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존치한 흔적들을 보면 웬만해선 더 이상 큰 감흥을 받진 못한다. 오히려 그런 하드웨어적 측면보단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된 재생 프로젝트가 어떻게 이용자나 지역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며 기획된 의도대로 잘 작동하는지에 대한 ‘작동하는 장소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최근 일반건축에서부터 주택, 카페 인테리어를 막론하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찍어내는 오래된 건물을 다루는 흔적 남기기 경쟁을 보면 설계자로서 하품이 나올 만 큼 큰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장소성의 의도가 장식성의 목적으로 바뀐 느낌이랄까..?


이제는 오히려 담백하고 덤덤하지만 그 공간의 용도에 적합한 기능과 콘텐츠를 충실히 담아내는 본질에초점을 맞춘 ‘꾸안꾸’함이 거추장스러운 옛 회상보다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자칫 눈에 보이는 물리적 장소성의 흔적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마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기 위한 테마파크의 그것들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우스꽝스러운 장식품처럼 보일 수 있을 때문이다. 적어도 무분별한 존치보단 최소한의 진화를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주변 곳곳에 남겨놓은 딱히 작동하지않는 장식적인 옛 흔적에 조금은 민망한 느낌이 들었음을 고백한다.


지붕 없는 건축
건폐율 100%


반면 이곳의 첫인상처럼 어릴 적 옛 공터의 추억을 떠올릴만한 기분 좋게 비워낸 건물 주변의 사이공간이 참 정겹다. 지붕만 없지 서로 다른 건물과 건물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공간들은 마치 건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아늑한 위요감이 느끼게 한다.


18년 전 조경설계사무소에 갓 입사해서 제일 먼저 읽었던 이론서인 건축가 아시하라 요시노부의 ‘건축의 외부공간’에서는 이와 같은 성격의 건축의 외부공간을 ‘지붕 없는 건축’의 positive space로 정의했다.


그의 이론에 따른다면 이곳은 지붕 유무의 차이가 있을 뿐 건폐율 100%에 가까운 p space로 구성된 적극적으로 정의된 공간이다. 다시 말해 실내외를 막론하고 어디 하나 허투루 쓰는 곳 없이 이용자들의 다양한 행태와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극대화된 공간구조인 것이다.  


경험하는 공간의 척도
Area? Volume??


실내에 들어서면 요즘 잘 나간다는 서울의 카페 수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카페 ‘헤이다’가 운영 중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트러스 구조로 기둥하나 없이 시원하게 뚫린 공간과 공장으로 사용한 건물답게 높게 솟아 있는 박공지붕 그리고 큼지막한 천창에서 유입되는 자연채광이 함께 어우러져 절로 고개를 들게 만드는 기대이상의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는 보통 공간의 크기를 가늠하는 척도를 면적에 의지한다. 세계 최고의 아파트 공화국에서 사는 국민인지라 누가 집을 샀다고 하면 습관적으로 바닥면적이 몇 평인지만 묻는다. 어차피 아파트 천장의 높이는 건설사가 이윤을 위해 정해놓은 뻔한 높이니 그렇겠지만 사실 공간을 경험하는 척도는 절대면적에 층고가 더해져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공간의 체적임을 기억하자. 


같은 면적의 공간이라도 지붕의 높이차에 따라서 인간이 느끼는 분위기나 공간감은 크게 차이가 난다. 우리는 이케아 쇼룸에 전시된 마음에 쏙 드는 가구가 막상 집에 가져와보니 옹색하기 짝이 없었던 경험을 한 적이 있고 그 이유에 자신의 집과 이케아 쇼룸에서 경험하는 높이로 인한 절대 체적의 차이가 큰 몫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조치원1927은 공항 터미널처럼 너무 높은 지붕으로 개방된 실내공간에서 느끼는 불편한 위압감 없이 휴먼스케일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딱 기분 좋은 개방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큰 기대 없이 잠시 둘러보고 가려고 했던 내 생각을 바꿔 커피 한잔을 마시려 지갑에 손이 가게끔 말이다.    


유연한 공간


마치 커튼처럼 한 덩어리의 공간을 필요에 따라 손쉽게 구획하고 이어주는 스윙도어로 카페공간과 메인 공연장은 이질 감 없이 확장되는데 열려있는 도어 사이로 천장의 트러스 구조는 물론 내장 마감 재료, 바닥재까지 모두 동일한 룩look으로 경계 없이 확장되는 풍경이 꾀나 근사하게 보였다. 문득 공연장 안에서 카페 손님들이 한적하게 차를 마시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다 잠시 커피 주문을 미루고 서둘러 발걸음을 안으로 돌렸을 만큼..


복합문화공간이라면 고정된 벽과 문을 통해 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틀지어 놓는 것보다 이와 같은 가변적인 장치를 통해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하는 것이 어쩌면 공식처럼 당연한 선택이었을 거라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관리와 운영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메인 공연장을 행사가 없는 평상시에 닫아두지않고 이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북카페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소비자로서 정말 반길일이 아닐 수 없다.


취향의 선택


분명 별도의 근생시설로 연결되는 카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휴시간 때 메인 공연장을 책이라는 콘텐츠로 공유하는 공간 기획은 이용자로 하여금 선호하는 공간 유형을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물론 지속적으로 이곳을 다시 찾아오게 하는 동기를 제공할 것이다. 비록 제대로 큐레이팅된 북카페는 아니어도 소박하지만 근사한 무대와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공연장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감상하며 누리는 이 신선한 경험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을까?

1927조치원_1955로마의휴일


조치원1927


우리는 주변의 비어있는 공간을 대할 때면 왠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방치하는 것 마냥 어떡해서든 서둘러 채워놓아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예전 내 기억 속 공터처럼 비어있는 공간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또다른 가치를 경험하게 된다.


1927년 일제강점기 시절 누에를 치는 잠사공장으로 시작하여 근 현대사의 역사를 지닌 채 21세기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재 탄생한 조치원1927은 지역의 문화 플랫폼으로서 다양한 콘텐츠들을 근사하게 담을 수 있는 비워진 공간_공터로서의 잠재력을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부디 그 잠재력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프로그램 기획으로 활발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조치원을 대표하는 문화거점공간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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