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은 허위 픽션이자 거의 다큐멘터리 같은 날 것의 이야기
목차: 1. 첫 소감 2. 영화 되짚기 3. 이해를 위한 참조 4. 후기 5. 해석의 여지 6. 문화적 장벽
감독/각본: 레오스 카락스 (데뷔작)
장르: 로맨스 (청춘)
줄거리: 세느 강변을 배회하던 알렉스는 어느 여인의 스카프를 주워든다. 알렉스는 자신의 애인인 플로랑스가 그의 친구인 또마와도 연인 사이임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하다 실패한 후벽에 이 사실을 기록한다. 한편 알렉스는 아파트 인터폰을 통해 미레이유라는 여인을 알게 되고 그녀를 잊지 못한다. (씨네 21)
이해가 안 되어서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 ㅋㅋㅋ
레오 카락스 감독님의 연출작 중 처음 본 건데 뭔가 이야기를 기다리다 끝나서 당황했다. 그러나 왓챠피디아 평이 너무 좋아서, 그 평을 보고 있으면 나도 이 영화를 좋아하고 싶어서 곧바로 다시 보았고, 또 관련된 리뷰글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니까 이해가 되었고 나도 이 작품이 좋아졌다.
1. "모든 것이 너무 느리고… 너무 무겁고… 너무 슬프다… 곧… 나도… 나이를… 먹겠지…. 그리고… 결국… 끝나게… 될 것이다."라는 어린이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2. 자신의 애인과 바람난 절친과 대면한 알렉스는 절친의 목을 조르고 미수에 그친다.
3. 알렉스는 걷다가 인터폰을 통해 얘기하는 권태기를 겪는 중인 한 커플(여:미레이유, 남:베르나르)을 엿듣고, 베르나르가 들어간 카페에 따라 들어가 떨어트린 어느 파티 초대장을 습득한다.
4. 알렉스는 습득한 파티 초대장을 갖고 파티에 참여하고. 그곳에서 엿들었던 커플의 미레이유와 만나서 긴 얘기를 나누고 같이 떠나기로 하지만 알렉스가 기차를 놓친다.
5. 미레이유는 집에서 자살(자해)를 하려던 중 알렉스가 찾아와 가위를 안 보이게 숨기는데, 알렉스가 달려와 뒤에서 안아버리며 가위가 복부를 찌르고 미레이유는 피를 흘리고 둘 다 쓰러진다.
(원문은 링크 참조) (의역)
Boy Meets Girl offers elaboration on the insistence that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젊음이 젊은이에게 낭비된다는 주장을 정교하게 설명한다. (중략) 이 영화는 흔하지 않은 명료함과 흉포함으로 지적화된 젊은 권태의 특정한 요소-20대들이 머릿속에 갇혀 자신들이 이미 삶을 완전히 살고 있고,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는 실패들로 자신들이 특정 지어진다고 어설프게 믿는다는 아이디어-를 붙잡는다. 비교의 지점에서 진정한 "긴 삶"이 부족한 그들은 자신들이 늙었다고 느낀다.
알렉스는 감독의 본명이며, 첫 작품인 이 영화가 자전적인 엑소시즘(내쫓음)의 형태를 표현하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종종 예술적인 영감을 찾는 척 하긴 하지만, 내용이 명백하게 감정의 채워짐(fulfillment)을 찾는 방랑자에 관한 것인 만큼 이 영화는 시도에 대한 시도의 영화이다.
알렉스는 미레이유에게 자신은 단지 꿈을 다시 꾸고 싶었기 때문에 최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어떤 영화가 제공했던 것보다 간결 명료하고 인정 어린 젊은 허송세월의 요약이다. 영화의 모든 비네트는 서브텍스트에 초점을 맞추고,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알렉스와 미레이유가 외톨이(loner)의 자세를 취하는 건 그들은 사랑에 대한 신화는 사실이고 자신들이 놓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하는 이들 중 일부가 되려면 무언가에 성공해야 한다고 느끼고, 자신들이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속담에 나올듯한 고조된 명확성의 환경에서 알찬 매일을 사는 단계로 성장할 거란 신화를 파열시킨다. 젊음과 늙음은 많은 것들로 하나 되는데, 가장 분명한 건 우유부단함의 자취이다.
Its conclusions on the subject of love may be its most obviously youthful element, a blending of cynical lucidity and atavistic romanticism into a fatalistic trajectory. 냉소적인 제정신과 인간 본래의 낭만주의(적 성향)가 숙명적인 궤도로 섞이는 사랑이란 주제에 대한 결론은 이 영화의 아마 가장 분명한 청춘적 요소다.
Perhaps the young artist Leos Carax, already a great melancholy elegist, embraced slowness in Boy Meets Girl because he knew the future was coming fast enough. In any case, he left us this luscious reminder that slow can be the furthest thing from boring. 아마 이미 훌륭한 구슬픈 애가 시인인 젊은 예술가 레오스 카락스는 미래는 충분히 빨리 오고 있는 걸 알았기 때문에 <소년 소녀를 만나다>에서 느림을 수용했을 수도 있다. 뭐가 되었건, 그는 우리에게 느림이 지루함과 가장 먼 것일 수도 있다는 감미로운 리마인더를 남겼다.
Thirty years after its release seduced critics with a nocturnal, jumbled dream of love and light, Leos Carax’s debut film, BoyMeets Girl, continues to burn with contradictions, seeming somehow to be younger today than it was yesterday. 야행성의 빛과 사랑의 뒤섞인 꿈으로 평론가를 유혹한 레오스 카락스의 데뷔 영화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개봉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반박으로 불타길 계속하며, 어째서인지 어제보다 오늘 더 어리게 보인다.
카락스는 무성영화의 관습을 초현실주의와 누벨바그(점프컷, 아파하는 것, 열정적인 대화)와 섞어 과거와 현실의 불안정한 혼합체를 만들어냈다. 장 이브 에스코피어의 장엄한 카메라워크는 조명, 깊이, 배경에 무성영화적 접근과 밤의 파리의 칠흑적이고 소원한 듯한 테이크를 번갈아 사용한다. 카락스의 자유로운 참조적 스타일 속 오래된 게 새로운 게 되고 새로운 게 오래된다.
Alex and Mireille are both young outcasts, struggling to transition into adulthood and brought down by their failures. The two bond over their failures, and have the hope of redemption through love. It isn’t sappy though, and whether or not such a thing is possible is left ambiguous at the end. 알렉스와 미레이유는 둘 다 젊은 외톨이로, 어른으로의 과도 속 사투하고 있으며, 실패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있다. 그들은 실패를 통해 유대감을 쌓으며 사랑을 통해 구원되길 희망한다. 지나치게 감성적이진 않으며 구원이 가능할지는 모호하게 남겨진다.
리뷰에 종종 등장하는 ennui란 단어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나도 이 주제로 글을 써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늘 과용되어 왔고, 나도 시도해 본 적 있고, 이 작품이 개봉으로부터 약 40년이 지났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도록 여전히 신선하다. 이 영화가 찬사를 받은 이유 중 하나로 훌륭한 *리퍼런스*가 있지만 누벨바그 영화사에 대한 나의 이해가 짧아 그 부분은 건너뛰며 시작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감탄한 부분은 너무나도 과감한 자신의 투영이다. 주인공한테 자신의 본명을 주고, 애써 숨기거나 고고한 척할 수 있었을 텐데도 자전적이라는 걸 가리지 않는다. 최근에 느끼는데 영화는 배짱과 용기가 있는 자의 미디엄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이 과반수이고, 그런 작품은 그런대로 끌리지만)
분명 완전무결한 수작은 아니다. 여러모로 제멋대로이며, 엄청난 플롯이라든지, 화려한 이야기의 기술이나 장치도 없다. 그렇지만 뭔가 영화의 본질을 의문하게 한다.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를 생각하며, 그 잣대를 여기에 들이댄다면 흠잡을 점이 많아진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닌 한 개인의 주관적 표현의 매체로, 그 자유로움이 남기는 해석의 여지와 뿌려지는 생각의 씨앗을 생각해 본다면, 우수성과 별개로 과연 내가 평가하는 게 맞는 걸까? 이런 개성이야 말로 좋은 영화의 조건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와닿았다거나, 좋고 나빴다는 그런 소감과 별개로 영화를 본 후 느낀 갈팡질팡함 속의 광대한 의미의 가능성에 조금 신났던 것 같기도 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느낌, 여러 말과 여러 뜻을 가득 담아놓고서는 부연하지 않는 뻔뻔함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쓴 편지를 주기 전 복사해서 보관해 두는 것, 자신의 역사를 지도에 그려 기록하는 것, 자신의 삶을 자서전적으로 접근하여 "살인미수"란 범죄적 사실조차 기록하는 것, 꿈을 이루려 하지 않고 꿈만 꾸는 헛함, 영화를 만들지 않고 영화 제목을 고민하는 모습 등, 사실 매우 동질감을 느낀다. 뭔가 쉬이 다른 곳에서 표현되지 않는 면모를 포착해 낸 게 맞는 듯하다.
이건 소년과 소녀의 "만남"의 대한 이야기다. 청년을 통해 만남을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만남을 통해 청년을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청년과 청춘의 불가결한 요소인 만남,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Boy meets girl"은 소년이 우연히 소녀를 만나면서 전개되는 로맨스 클리셰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표현은 그 클리셰를 차용하기 위해서가 아닌 반박하기 위해서다. (프랑스에서도 제목은 Boy Meets Girl). 우리는 주변의 수많은 미디어와 일화 속에서 이상을 주입당한다. 이야기 속 캐릭터들은 서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같이 성장한다. 그렇지만 세상은 다르다. 많은 청년들은 실패를 겪으며 미레이유처럼 낙망하거나 알렉스처럼 시도를 피하고 망상 속에 산다. 어느 쪽도 유쾌하지는 않다. 흔히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며 구원받기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실상은 처지가 동일한 이와 만나는 운명적인 일이 발생하여도 서로의 구원자로 발전하기는커녕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다른 커플들이 등장한다. 미레이유와 베르나르, 플로랑스와 알렉스, 플로랑스와 또마, 전 애인의 작품을 강에 버리는 여인의 커플, 계속 싸우며 집을 나가고 물건을 던지는 옆집부부, 길가에서 마주친 키스 중인 커플, 건너편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커플 등. 이 중 싸우지 않는 건 유일하게 길거리의 커플과, 건너편의 커플, 두 쌍 뿐이다.
건너편의 커플은 늘 창문이란 '프레임'을 통하여 보이며, 꼿꼿한 게 마네킹을 연상시킨다.
길거리의 커플은 카메라 대신 직접 돌고, 알렉스는 공연이라도 본 것 마냥 동전을 던진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커플 중 유일하게 이상적인 두 커플의 연출만이 이렇게나 작위적인 건 소위 말하는 "이상적인 커플"이야말로 가짜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 애인의 작품을 강에 버리던 여인이 흘린 스카프를 또마가 줍고, 그걸 알렉스는 플로랑스 것으로 착각하고 가져간다. 그리고 나중에 미레이유와 대화할 때 "이 스카프는 그녀가 유일하게 남긴 거야. 그래도 너무나 그녀 다운 거지."라고 한다. 알렉스는 현실의 재료를 재해석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생성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알렉스가 하는 말들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깨닫는다. 뭐 이리 확실히 알려주는 게 없는지 짜증 나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인간다운 부분이다. 너무나 그녀답다는 말, 타인의 것을 그녀의 것으로 착각한 것도 모자라 그녀답다고 말하는 게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지를 비꼰다.
파티에서 한 노인은 벙어리이면서도 자기 할 말을 하느라 타인에게 발언권을 넘기지 않고 무성영화를 찬미한다. 어느 한물간 성우는 자신은 이룬 게 아무것도 없지만 모차르트가 죽을 때의 나이보다 두 살이 더 많다며 방법은 머리통을 박살 내는 것이라고 한탄한다. 미레이유는 화장실에서 자해를 하려다 머리를 자른다. 모두에게 심어진 어른이 된다는 개념의 환상은 성인이 되고난 후, 그리고 쭉 이후에도 그 환상간의 괴리로 우리를 불행케 한다. 이 영화에서는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의, 자아는 비대하지만 소심하고 위축된 모습을 포착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렉스는 미레이유를 안아주는데 그게 들고 있던 가위를 복부에 찌르는 행위가 된다. 미레이유가 물을 틀어놓고 '베르나르... 이제 난 널 떠나'라고 한 걸 보면 자해가 아닌 자살시도였을 것이다. 그녀의 자살에 당연히 알렉스는 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안아주었을 때 그녀는 그를 보고 "알렉스 도와줘... 여기서 나가게 해 줘"라고 하는데, 여기가 이승일까 아니면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일까. 죽여달라는 것일까, 살려달라는 것일까. 영화는 끝까지 모호한 채로 막을 내린다.
해석의 여지가 풍부하다. 이 영화로 천재라고 칭해진 건, 어린 감독이 인간의 생생한 면모를 넘치게 담았으며, 또 제멋대로의 전개로 보여주는 대담함 때문인 것 같다. 몇 몇 리뷰에서는 이 영화가 청년들의 무위와 권태를 비판하는 주장을 펼쳤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명하고 이해하려는 것처럼 느껴진 건 나의 주관이 많이 덮혀진 해석이겠지만 적어도 비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포착하고 그려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1. 반복되는 습득: 스카프를 줍고, 초대장을 줍는다. 플롯포인트가 별로 없는 영화에서 두 번씩이나 등장한 게 신경쓰인다. 우리에게 통제권이 없는 삶의 무작위성을 습득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일까?
2. 상표가 빠진 티백: 분명 괜히 넣은 건 아닐 텐데 무슨 의미일까?
3. 무임승차하는 소년과 지하철 장면의 역할: "난 비열한 기회주의자 희생양이야. 내 더러운 엉덩이와 물집, 안 맞는 신발, 사람들은 신발로 우리를 평가해", "내 발이 자라듯 내 영혼도 자란다, 난 모든 면에서 고상해졌어"
4. 미레이유의 기차 동행 여부: 정말로 탄 걸까? 알렉스의 착각일까? 만약 정말 탔다면 왜 알렉스는 화장실에 갔다가 고작 게임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 것일까? 회피일까?
5. 엔딩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6. 특정 샷의 역할과 선택 이유: 몇몇 커플만 이렇게 헤어진 애인의 눈과 뒷모습의 오버레이가 있다. 어떠한 이유로 선택되었고 어떠한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7. 스탠의 날짜 오류가 암시하는 것: 분명 초대장에서는 서거 10주년 파티라고 하는데 본인이 말할 때는 3년 전이라고 한다. 그녀가 틀리게 말하도록 쓴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이 영화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이 큰 것 같다. 분명 노인인 줄 알았던 시작의 보이스오버는 리뷰를 통해 어린아이인 걸 알았고, 계속 주인공이 먹고 부시는 작은 병의 액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대화들이 장황하고 추상적이라 와닿지 않는다. 이게 내용의 문제인지 문화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 맥락 파악이 어려웠고 뉘앙스 파악도 잘 안 됐다. 무언가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답답했다.
지금 내가 쓴 후기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오래 잡고 있었어서 내 속에 함몰되는 기분이다. 그러니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