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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고백

김영민 단문집

by 글섬

만일 에세이를 쓴다면 이와 같으면 좋겠다. 담백하고 심오하며 심미적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사생활이 최소화된 순수 산문이다. 배운 바 깊고 필력이 남달라야 가능한 글이다. 저자가 가진 백 가지 소양 중에 열 가지 정도만 살포시 드러나기에 그 내공으로 더없이 안정적이다.


내가 전혀 즐기지 않는 에세이라는 장르를 처음 접했던 책이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였다. 선물로 받은 책이었는데 지금은 최애하는 에세이다. <가벼운 고백>은 김영민 교수가 (아마도) 평소 메모해 두었던 글들을 잘 배열해 출간한 단문집으로, 겨우 한두 줄 짜리 메모들도 경제적 가치로 환산 가능한 그의 사회적, 인문적 존재감이 부럽기 그지없다.


그냥 읽어 넘기기 아까운 문장이 많아 필사 노트에 옮겨 적으며 생각한다. 다시 살 수 있다면 김영민 교수처럼 공부하는 삶을 택하고 싶다. 넓은 의미로 보자면 삶 자체가 공부겠지만, 그런 모호하거나 광의적인 공부 말고, 좁고 깊은 길을 통해 넓은 길로 나아가는 그런 '정식' 공부가 직업인 삶을 살고 싶다. 무엇보다 김영민 교수 같은 지도자 밑에서.


양친 모두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형제들 중 누구도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 혼자 대학을 다니고 졸업을 하다 보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을 대학 4년을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도 엄마의 갱년기가 통째 삼켜버렸고, 그 결과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모호하게나마 원했던 딱 한가지, 석사과정을 감히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돌이켜보면 부모를 포함해 누구도 내게 지도자는 물론이고 어른조차 아니었는데 혼자서 길을 찾아낼 만큼 현명하지도 못했다. 정말 소중한 꿈이었다면 싸워서 쟁취했어야 했다. 싸우는 건 어렵고 쟁취는 요원해 순응이 가장 쉬웠기에 내 삶이 내 탓이 아니라고 우기다 누구 탓도 할 수 없는 어른이 돼버렸다. 물론 지금은 이토록 조그맣고 무용하기만 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또 감사할 만큼은 건강한 어른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여전히, 부모에게 매몰되지 않고 나를 지켜낼 용기를 내지 못했던 어린 시간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데 가끔 나는, 아니 이젠 그보다 자주, 나의 나태와 무지를 가난하고 무지한 부모 뒤로 숨긴 채 살아왔던 건 아닐까, 심각하게 의심한다.(혹은 자각한다.) 엄마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울건 말건,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뺨을 때리건 말건, 아니 그러니 오히려 더욱 나의 길에 집중했어야 한다. 대학원 학비는 조교 생활로 충당하고 엄마는.. 음.. 엄마는...


교수라는 직업이 평생 공부를 하는 직업이라는 걸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이나 지나버린 뒤에 빠리에서 만났던, 교수가 목표였던 미학과 친구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나는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바보 아닌가.


마흔을 훌쩍 넘겨 18, 19세기 프랑스 문학과 영미 문학 번역을 의뢰 받느라 만났던 철학과 노교수님은 나를 죽고 싶게 했다. 잘못 살아왔다는 걸 절감했던 것이다. 그 끝없는 공부의 세계는 정말이지 나의 취향과 꼭 맞아떨어졌고, 그렇기에 더욱 무지하게 지나가버린 지난 시간들을 통째 삭제하고픈 욕구에 시달렸다. 소크라테스는 얼마나 옳은지. 나 자신도 모른 채 살았던 시간의 대가를 깨닫고 죽도록 고통스러워 했지만, 무섭도록 달콤하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김영민 교수의 글에서는 그게 읽힌다. 공부하는 자, 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 정진하고 있는 자의 고뇌와 충만이 여실하다.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위트도 부럽지만, 아직도 여전히 공부의 정도(正道)를 희구하는 그의 태도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공부에 대한 한결같은 그의 태도에 비하면 탁월한 그의 필력은 새 발의 피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김영민 교수의 글에는 사설이 필요치 않은데. 교수의 속깊은 상념들을 아래에 옮겨본다.





- 당신은 당신이 매일 하는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매일 할 것인가.


- 골키퍼는 가만히 있었다는 말을 듣기 싫어 일단 몸을 던지고 본다. 인생의 결정이 대개 그러하다.


- 누구나 인생행로에서 많은 산을 넘어야 한다. 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산 그리고 산 넘어 산.


-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생계 수단을 잃는 것을 뜻한다면, 그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 과대평가는 결국 상대를 망친다. 누군가를 꼭 협박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라. "자꾸 그러면 당신을 과대평가해버릴 거야."


-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는 두려움과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는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한다.


- 인정 투쟁을 남하고만 하나. 자기 안에서 자기끼리도 한다. 나는 나의 반명교사요, 타산지석이다.


- 사람 대부분은 자신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근처를 서성거리다 죽는다.


- 권력자란, 누군가 무언가를 (그걸 하기 싫어도) 하게 하는 사람이겠지.

하기 싫은 걸 안 해도 되기 위해 그간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니까 하기 싫은 건 안 할 거야.


- 학문하는 이들은 모름지기 동시대 최고의 것 그리고 고전을 찾아 읽겠다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읽는 이의 지성을 쇠퇴시킬지 모른다. 특히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알았다는 착각을 주는 동시에 사람의 머리를 나쁘게 만드는 부류의 것들이 있다. 그런 문건에서는 자료만 취하면 된다.


- 인간은 선을 행할 정도로 혹은 악을 행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다.


- 경청은 중요하다. 이 경청에는 자신에 대한 경청도 포함된다.


- 남의 글을 비판할 때 자신의 편견과 무식을 광고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남들을 근거 없이 욕하는 경우를 보면 대개 근거 없는 자기 자랑인 경우가 많다. 합창하듯 자신의 무식을 뽐낸다. 내가 이래 봬도 얼마나 무식한데!


-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계약보다, 혹은 교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상호 돌봄의 관계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돌봄을 잘 받을 수 있는가. 각자의 방식대로 귀여워야 한다.


-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한 지도 10년이 넘었는데, 술 문화와 골프 문화는 결국 적응이 안 된다. 그들이 보기엔, 내 삶은 승려와 같은 삶.


- 인터넷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남자를 시험해보고 싶으면 아주아주 잘해주면 됩니다. 그릇이 큰 자는 감사할 줄 알고, 병신 새끼는 가면을 벗기 시작하지요."

'남자'란에 학생, 선생, 친구, 동료 등 다양한 항목을 넣어보자.


-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 자기가 공부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 소를 잃고 나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이 있고

'소 잃은 외양간'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관광지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 사람은 인정 욕구 때문에 돌아버릴 수 있다. 누군가 갑자기 지나치게 '지랄'을 한다면, 인정 욕구 버튼이 눌렸을 가능성이 높다.


- 어디 혁명뿐이겠는가. 잔소리도 세상을 바꾼다.


- 살바도르 달리의 고향에 오니 달리가 달리 보였다. 초현실주의자가 그린 것은 결국 자신의 현실일 뿐이다.


- 미국의 작가 매릴린 로빈슨은 고교 시절 선생이 해준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마음은 평생 함께 살아야 할 대상이니 아름다워야 한다."


- 멸종 위기에 있다는, 사심 없는 다정함을 추구하도록 하겠다.


- 뭔가를 읽었다고 해서 자신이 무엇을 읽었는지 꼭 알겠는가. 뭔가를 보았다고 해서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꼭 알겠는가. 뭔가를 들었다고 해서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꼭 알겠는가. 자기 손으로 뭔가를 만들었다고 자신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꼭 알겠는가. 자신이 만들고 읽고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명징하다고 해서, 그 대상의 의미가 다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대상의 의미는 늘 창작자와 경험자의 마음을 초과한다. 그래서 평론이 필요하다.

평론은 비평하는 작품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글이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 작품이기도 하다. 지시하고 비평하는 작품이 무엇이든, 평론은 그 자체로 읽을 만해야 한다. 그 자체에 내장된 동력과 리듬과 통찰과 지성과 정념과 아름다움과 감수성과 '미친 맛'으로, 읽을 만해야 한다. 그리하여 글쓴이 마음의 서랍에서 벗어나 결국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두루 읽히는 하나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 왜 과일은 썩기 직전에 가장 달콤한가. 달콤한 것은 왜 다 썩기 직전의 상태인가.


- 진정한 여행은 여행 전의 기대와 여행 후의 기억에 있듯 진정한 삶은 살기 전의 꿈과 살고 난 후의 기억에 있다. 그래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쓴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걸작을.


- <문라이트>(2016)를 보고 왔다. 결국 위엄의 한 자락을 놓지 않는 이들의 연대기라고나 할까. 세상의 아주 소수만이 끝내 자신만의 작은 위엄을 지킨다.


- 장인은 도구 탓을 해도 도구는 장인 탓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구는 장인에게 없는 위엄이 있다.


- 완성된 것은 그 나름의 심미성을 띤다. 그래서 완벽한 천박함은 더 이상 천박하지 않다. 완벽한 멍청함도 더 이상 멍청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많은 이가 많은 일을 대충 한다. 대충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이 언젠가 대충주의를 완성하길 바란다.


- 큐비즘 아닌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인물화가 아닌 구스타프 클림트의 풍경화, 근경이 아닌 오스카어 코코슈카의 원경 그림, 발레리나를 그리지 않은 에드가르 드가의 풍속화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그림들을 봄으로써 피카소의 큐비즘, 클림트의 인물화, 코코슈카의 근경화, 드가의 발레리나가 공들인 선택임을 비로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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