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지음 / 창비 엮음
작가 스스로 '고통 3부작'이라고 부르는 이 작품을 나는 '폭력 3부작'으로 기록한다.
1부, 가정 폭력, 2부, 확장된 가정 폭력, 3부, 사회 공동체 폭력.
3부 모두 폭력 피해자가 아닌 주변인의 시선이다. 몰이해나 방관 자체로 충분히 폭력임을 견지하듯.
10년도 훨씬 전에 이 책을 접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대의 차가운 손>으로 처음 한강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뒤 좀 더 들어가는 의미로 연달아 읽었던 도서였는데 충격 그 잡채였다.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미술에 대한 작가의 발군의 이해력이 <채식주의자>에서는, 발간 당시로서는 난해하기 짝이 없었던 비디오 아트의 세계관을 격상시키며 과감하고 다채로운 예술적 질문과 함께 정점에 도달해 있다. 만일 당시에 작가가 지금만큼 유명했다면 아마도 분명 다다르지 못할 경지의 과감한 표현력이 이 역사적인 글의 핵심이다. 그 선정성이야말로 무해성의 상징인 식물과 대비되는 폭력의 중추 역할이므로 저자로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도구였을 것이다. 마치 영혜의 형부가 꽃술의 접합을 표현해내기 위해 삽입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처럼.
독자가 불편할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는 선정성은 작가의 이전 작품이나 이후 어느 작품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만큼 이 글에서는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도구이다. 어휘력이 작가들 사이에서도 단연 발군인 한강이기 때문에 그 선정성은 더욱 도드라지고, 이는 작가가 다분히 의도한 연출로 읽힌다. 세간에 회자될 만큼 강력한 선정성이야말로 작가가 그려내고 싶은 비디오 아트적 표현과 동시에 부지불식간에 행해지는 폭력을 강렬하게 대변할 수 있는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 선정성 논란은 그 자체로 작가의 남다른 필력을 대변하는 셈이다.
다시 읽어도 2부의 비디오 아트 부분은 압도적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3부가 통째 기억에서 날라가는 폐해가 발생한다. 나의 기억 역시 주인공 영혜가 베란다에서 맨몸으로 팔을 뻗어 해바라기 하는 모습으로 글이 마감된다. 3부가 통째 기억에서 사라진 셈이다. 다시 읽으니 놀랍게도 3부에 거의 모든 게 포진되어 있었는데 말이지.. 다시 읽은 <채식주의자>는 기억보다 훨씬 더 친절했다.
십여 년 전의 나는 몽고반점의 의미를 전혀 몰랐다. 다시 읽었을 때 몽고반점은 완전무해한 태초의 표식으로 선연했다. 자라면서, 말하자면 사회화를 거치는 동안 자연히 사라져야 하는 몽고반점을 몸에 지닌 여인은 식물과 동등한 존재를 대변한다. 그만큼 유약한 존재를 상징하기도 하는 몽고반점이 또 다른 폭력을 배태한다는 점에서 점점 더 확장되기만 하는 폭력의 가중성을 아프게 표상하고 있다. 일단 시작된 폭력은 멈추지 않는다. 가중될 뿐이다. 어느 분야에 어떤 방식의 폭력이든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가정 폭력의 경우엔 대상이 한정적인 만큼 더욱 집요하다.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43페이지)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은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51페이지)
아버지로 시작된 물리적 폭력은 남편의 자기중심적인 무관심의 폭력으로 이어지고, 그나마 그녀의 파행을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형부에게로 번져 변이한다.
"그녀가 살았으면 하고 그는 바랐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는 의문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버리려 했던 순간은 인생의 코너 같은 거였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ㅡ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ㅡ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다시 깨어난다 한들 그 상황이 변해 있을 리는 없다. 이번의 시도는 충동적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시도할 수도 있다. 그때에는 좀더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진행해, 이렇게 방해받는 일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 문득 그는 차라리 그녀가 깨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어난다는 상황이 오히려 막연하고 지긋지긋해, 눈을 뜬 그녀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97페이지)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 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98페이지)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98~99페이지)
자해한 영혜를 업고 병원으로 향했던 형부가 영혜의 자해를 통해 각성하는 순간이다. 이전에 자신이 행했던 모든 작품 세계가 역겨워지며 스스로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베란다에서 손을 활짝 벌려 그림자를 만드는 그녀의 넋잃은 모습, 그의 아들을 씻길 때 헐렁한 트레이닝복 바지 아래로 드러나던 흰 발목, 방심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모습, 반쯤 벌린 다리, 흐트러진 머리칼을 기억할 때마다 그의 몸은 뜨거워졌다. 그 모든 기억 위로 푸른빛 몽고반점이 찍혀 있었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범. 오래전 갓난 아들의 엉덩이를 처음 만지며 느꼈던 말랑말랑한 감촉의 희열과 겹쳐져, 그녀의 한번도 보지 못한 엉덩이는 그의 내면에서 투명한 빛을 발했다." (103페이지)
영혜의 몽고반점을 인식한 후에야 영혜는 그의 뮤즈로 부상한다. 뮤즈를 만난 예술가에게 브레이크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수년씩이나 예술적 영감이 막혀 있던 예술가로선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할 각오가 저절로 내제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예술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어디까지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124페이지)
"예전에 그녀의 집에서 우연히 보았던 앞모습이지만, 저항 없이, 엎드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덧없는 아름다움으로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누선을 건드릴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마른 쇄골과, 누웠기 때문에 소년처럼 밋밋해 보이는 가슴, 드러난 갈빗대들, 관능 없이 벌어진 허벅지, 눈을 뜬 채로 잠든 것 같은 사막 같은 얼굴까지.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는 그런 육체를,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처음 보았다." (127페이지)
이 문장에서, 수년 전 퐁피두 센터에서 관람했던 비디오 아트가 떠올랐다. 화폭으로 쓰인 흰 천 위를 나신의 여자들이 파란색 물감을, 처음엔 손과 발로, 나중엔 온몸으로 채색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었는데 행위 자체의 예술성에 비해 여인들의 움직임이 너무 단선적이었다. 선명한 파란색 점과 선 들에 비해 여자들의 표정이 너무 많고 작위적이었다. 뭔가 상치되는 듯한 이 느낌 때문에 한참을 쳐다봤지만 결국 이유를 알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었다. 70년대 후반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시대적으로 그런 역할을 해낼 여자들이란 게 결국 직업 여성들밖에 없었을 때라는 걸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여자든 남자든 예술적 표현을 행하는 주체자가 필요한 비디오 아트의 경우 그들의 자체적 힘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오로지 식물이 되고자 했던 영혜는 그 완전무해성과 열망의 일관성을 통해 그의 비디오 아트를 완벽하게 표현해내고, 그는 열광한다. 그리고 그 열광이 선을 넘는다. 선을 넘는 모든 건 폭력이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230페이지)
"지금 그녀가 남모르게 겪고 있는 고통과 불면을 영혜는 오래전에, 보통의 사람들보다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 걸까. 그러던 어느 찰나 일상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린 걸까. 잠을 이루지 못한 지난 석달 동안 그녀는 이따름 혼란 속에서 생각해왔다. 지우가 아니라면ㅡ그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ㅡ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고." (245~246페이지)
"바보같이.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씻으며,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바보같이,라고 되뇐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259페이지)
어째서 아무도 묻지 않는 걸까. 왜 채식을 그토록 고집하는지. 왜 차라리 죽음을 원하게 되었는지.
왜냐면 두려우니까. 실은 우리 모두가 갖은 얼굴의 폭력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걸 애써 외면해야 하니까.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너무나 두려우니까. 실은 우리 모두 저 자신에 갇힌 쫄보니까.
그래서 매일 새로 힘을 내어 웃고 있을 뿐이기에 질문은 금기시된다. 영혜에게 가해진 폭력의 강도가 비교적 낮은 수위로 설정된 건 그 때문으로 읽힌다. 닥치고 살아내라. 그것만이 생에 대한 마땅한 태도다.
이 금기를 깨뜨린 자에 대한 가없는 가학, 너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는 이름, 채식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