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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장편소설 / 전은경 옮김 / 들녘 출판사

by 글섬

진정으로 고전어와 문학을 사랑하는 고전문헌학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비 내리는 어느 날 출근길에 다리 난간에 서서 뛰어내릴 듯한 여자를 발견한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수수께끼 같은 그 여자와의 만남을 축으로 그는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깨닫는다. 그 여자가 발음했던 포르투갈어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빗물처럼 스며든다. 지난 30년의 교사 생활 동안 단 한 번의 지각도 결근도 없었던 그가 수업 도중에 태연히 외투만 챙긴 채 교실을 나서 그 길로 학교를 떠난다. 갑작스럽게 경로를 벗어난 그가 경로 재설정을 위해 선택한 건 에스파냐 책방이었고, 그곳에서 포르투갈어로 쓰여진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만난다. 책방 주인이 번역해준 서문에서,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중략)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28페이지)


그레고리우스는 자기 생의 결핍을 마주한다. 그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글을 따라 그의 생을 되짚어감으로써 그 자신이 놓치고 있던 생의 이면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무려 세 번째 읽는 책이었지만 예의 철학적 질문들로 인해 마치 처음처럼 더디고 더뎠다. 다만, 세 번의 독서 사이에 흘러간 십여 년의 시간은 여실했다. 이제 더 이상 인물의 서사에도 고뇌에도 파묻히지 않았다. 나는 인물 바깥에 서 있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인생을 따라가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도 모르는' 인생이라는 열차 칸에서 '내가 말하는 나와 남이 말하는 나.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가?'라는 화두를 쫓아가는 동안 나는 앞선 두 번의 독서와 달리 그의 열차에 따라 오르지 않았다. 이건 그레고리우스가 이전 30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리스본으로 향하는 것과 맞먹는 혁신이다. 덕분에 아마데우의 글을 통해 작가가 무차별적으로 던져대는 자아와 인생에 대한 질문들이 더 이상 묵직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건 뭐냐면, 살아볼 만하다는 거다. 고전어에 정통한 교사 그레고리우스가 아니어도, 평생토록 자기 자신으로서 충실했던 지식인 의사 아마데우가 아니어도, 그저 살아내기만 해도 저들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이 새삼스럽지 않게 되는 비결이 우리네 삶 자체에 이미 깃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세 번의 독서 끝에야 만난 이 신선한 독서가 단지 나이듦으로 인한 감정의 메마름에 따른 결과라고 해도 무척이나 흡족하다. 나로선 분명 지난한 등반 끝에 만난 어느 봉우리의 탁 트인 시야이기에 이 가지런한 이성적 시선에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말하자면 흰머리처럼 마치 그 어떤 업적 같다.


작가는 아마데우를 통해 "사유의 바깥쪽에는 설 자리가 없"으며,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라고 역설한다. 요컨대 산다는 게 명징한 의식과 철학으로만 구현되는 건 아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더 나은 인식을 위해서는, 낯선 언어와 낯선 세계를 무릅쓰는 그레고리우스처럼,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결국 리스본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이면을, 야간열차는 주간까지 기다릴 수 없는 간절한 목마름의 자기 인식을 표상한다.


인식하기 어렵고 예견도 장담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대변하듯 그레고리우스는 심각한 어지럼증을 느껴 귀로에 오른다. 정밀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들어서던 그가 주치의에게 "나를 잃어버릴 병이라면 어쩌지요?"라고 묻자, 주치의는 차분하고 굳건한 눈길로 "나한테 처방전이 있어요."라고 답한다.


누구나 어느 날 갑자기 야간열차에 오를 때가 온다. 열차는 방향도 목적지도 알 수 없어 어지럽다. 하지만 어느 역에 정차해도, 심지어 열차가 탈선한다 해도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각자에게 맞는 섬세한 방식의 처방전을 이미 가지고 있다. 야간열차는 우리가 항상 지니고 있었으나 알지는 못했던 그것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다. 어느 날 야간열차에 오르게 되면 어지럼증을 견디며 그려보자. 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내 마음 속의 우물에 도착하는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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