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밀러 지음 / 이은선 옮김 / 이봄
애초엔 누구나 다르지 않다. 평범함조차 애써 도달해야 할 어떤 최선이다. 키르케의 첫사랑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지만 평범에도 미치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대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운명은 고통의 표면으로 온다. 만일 키르케가 첫사랑을 이뤄 결혼이라는 피상적 행복쯤으로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게 되는 운명으로 흘렀다면 본연의 힘을 깨닫기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첫사랑을 처참히 일그러뜨려 키르케를 극단의 고통으로 몰고 감으로써 그를 각성의 길로 이끌었다.
당장은 알 수가 없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 피어날 어떤 꽃의 씨앗인지를. 그저 믿어야 한다. 지금 고통스럽다면, 이미 내일의 꽃이 움트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그러냐면, 반드시 그렇다. 왜냐면 고통은 현재 진행형뿐이기에.
한동안 이 책은 나의 선물 목록 1순위였다. 이 책에서 내가 캐낸 '마법'을 선물 받은 이들도 캐냈는지는 모르겠다.
"마법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기 스스로 찾지 않으면 못하는 거야." (92페이지)
누구도 누구에게 표지는 될 수 있어도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 그게 삶의 공평함 중 으뜸이다.
파르마케이아. 세상에 변화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약초 파르마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녀. 땅 자체에서 나오는 능력이기에 신계의 일반적인 법칙을 따르지 않으므로 신의 한계에 구속받지 않는 존재. 때문에 신계에도 인간계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
작가는 신화 속 키르케가 마녀라는 점에 착안했다. 키르케는 8세기 호메로스가 지은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의 발목을 잡아 그의 귀환을 늦추는 아이아이에의 마녀로 잠깐 등장하는 조연급 님프이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긴 하지만, 신의 세계에서 님프는 자기 삶의 결정권이 전혀 없는 말단 중에서도 말단이다. 작가 매들린 밀러는 여신이라면 대개 질투와 변덕이 심하고 미모에만 집착하며 후계자를 낳는 데 만족하는 존재로 그려졌던 서양 문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마녀라는 존재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사회가 여자에게 허용해준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에게 주어지는 단어가 마녀라는 관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발상의 전환 그 자체다. 학사와 석사 모두 고전학 학위를 얻은 이력답게 매들린 밀러는 그리스 신화 속 모든 인물과 이야기를 그녀만의 베틀에 감아 새로운 직물을 짜 내는 데 성공했다. 능수능란한 그녀의 직조술 덕분에 나 같은 신화 젬병도 책을 놓지 못하는 병폐가 발생한다.
신계의 최하위 존재를 통해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극복하는 성장기로만 쉽게 읽혀지다가 뒤통수를 맞는다. 헬리오스의 황금색 머리칼을 지닌 존재가,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기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답을 할 필요가 없는" 마녀가 한낱 님프로서, 그것도 못생긴 님프로서의 태생적 한계와 좌절, 멸시와 자기 혐오, 오판과 실패 끝에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 성장해 다다르는 곳이 인간계라니. 인간과 인간 생애에 대해 이보다 열렬한 애정 표현이 또 있을까. 키르케가 신으로서 스스로 짊어진 모든 의무를 다하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기꺼이 인간을 선택하는 순간, 삶의 의미가 새로이 쓰여진다. 살아있음으로 겪어내야만 하는 불행한 운명도, 그에 대한 두려움도 다르게 읽힌다.
"키르케, 그가 말한다. 괜찮을 거예요.
신탁이나 예언이 아니다. 어린애한테 함직한 얘기다. 그가 악몽을 꾼 아이를 안고 흔들며 다시 재울 때, 베인 상처를 소독할 때, 뭔가에 쏘인 곳을 진정시킬 때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어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의 살결이 내 살결만큼 익숙하다. 밤공기 위로 따뜻하게 번지는 그의 숨소리가 들리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무섭지 않다는 뜻에서 한 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여기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파도 속에서 헤엄친다는 게, 흙을 밟고 걸으며 그 느낌을 감상한다는 게 그런 뜻이다. 살아 있다는 게 그런 뜻이다." (500페이지)
좋은 책일수록 읽을 때 밑줄을 긋지 않는다. 다시 읽겠다는 의지의 일환으로, 다시 읽을 때는 밑줄이 달라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키르케가 미운 오리 새끼처럼 가족의 지탄 속에서도 홀연히 홀로 서기 위해 아이아이에 섬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부분에 밑줄을 그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N차의 희열이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전지전능한 인간인데 그 전능한 의지의 한 귀퉁이도 활용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