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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섬 Jun 23.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해관계의 영역

일상은 소중하다. 특별한 날들의 바탕색이 되어 이름 없이 스쳐 지나가는 일상이라는 중심축이 없다면 특별한 날도 특별할 게 없다. 돌이켜보면 돌아가고 싶은 순간 역시 평범한 일상이다.


프레임은 일상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고정된 일상의 앵글 안에서 인물들의 일상적인 움직임이 하품이 날 정도로 지루하게 이어진다. 무수한 평론가들의 만점에 가까운 평점이 아니었다면 중도 포기를 고민했을 뻔한 지경이다. 기승전결의 막을 의미하는 듯한 단색의 추상적 영상과 동시에 고막을 자극하는 불협화음의 효과음은 흡사 시위하는 전위예술인 냥 기를 쓰고 단조로운 일상을 찢어발긴다. 그리고 다시 일상이 이어진다.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아이들이 뛰놀고, 아침이면 학교 갔다가 돌아와 집앞 개천에서 물놀이를 하고, 주말이면 가족 모임이나 생일파티를 하는 일상의 프레임 뒤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각장의 연기가 고요히 피어오른다. 처음엔 평범한 가족의 일상 뒤로 들릴락말락 간헐적이던 수용소의 소음이 일상의 소음과 맞먹을 만큼 확대되어 가는 동안에도 딱히 불편하지 않다. 과도한 정보력으로 인해 프레임 뒤로 흐르는 연기나 소음이 수용소의 그것이었다는 걸 미리 알지 못한 상태였다면 딱히 눈귀를 어지럽히지 않았을 만한 일상의 단편쯤이다.


세대를 거듭해 범세계적인 지탄의 역사지만, 그 역사의 핵심 가해 당사자지만, 아이 다섯의 가장에게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을 학교 보내며 출근을 하는, 어제와 같은 일상이다. 퇴근을 하면 온종일 다섯 아이를 돌보느라 지쳤을 아내를 대신해 동화책을 읽으며 아이들을 재우고 밤마다 복도에 나와 잠을 설치는 어린 딸아이를 소중히 안아 방으로 옮겨 재워주는 충실한 가장이다. 전출 소식에 아내와 의견 충돌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작전명에 우쭐해져 한밤중에 잠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을 하다 칭찬 대신 잠을 깨웠다고 핀잔을 듣는, 너무 평범해서 무력감이 들 정도다. 충실한 가장답게 그는 매일 아침 힘차게 출근을 해서 충직하게 일을 했을 뿐이다. 역사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다. 일의 성격은 그의 선택지에 없다. 그는 군인이고, 군인에겐 지령이나 임무가 일이고, 아이가 다섯인 직업 군인으로서 그저 일을 했다. 다만, 아주 잘했다.


갸웃해지기 시작한다. 뭐지..? 전범의 일상이 나와 어디가 다른 걸까. 유대인을 향한 무슨 대단한 혐오감이나 증오, 하다못해 가학적 발언이나 수위 높은 사명감 따위는 개나 줘버렸다. 그래서 섬뜩하다.

나도 일상을 산다. 나도 나의 프레임이 존재한다. 나의 프레임 밖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나 아우성 따위엔 무심하다. 나의 일상이 무너지면 그게 뭐든 아무 소용 없으니 기를 쓰며 일상을 단조롭게 밀고 가는 동안 나의 프레임 밖에서는 여전히 사회 구조적으로, 혹은 단순한 우연이나 불행으로 인해 프레임이 무너진 이들의 비명이나 시신들이 즐비해도 내 알 바 아니다. 매일 신문을 읽고 뉴스를 보며 사회 약자나 구조적 피해자들에게 관심 있는 척 지식인 코스프레를 해대지만 실은 지인들과의 화제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방금 전 장교 회의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유대인을 더 빠른 공정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 골몰하고 제안하던 인물이 회의가 끝나자 군내 병원 침상에 누워 멀쩡한 몸을 정기 점진 받는 모습은 어디서 무슨 짓을 해도 온통 자기밖에 모르는 내 모습 그대로이다. 구토감이 인다.


결국 주도권의 문제이다. 주도권을 쥐면 부지불식간에 도처에서 가해는 일어난다. 주도권자의 평안한 일상은 가해를 더욱 부채질한다. 당시 나치의 학살은 비단 유태인만 대상이 아니었다. 나치즘을 반대하는 공산주의자, 집시, 심지어 동성애자까지 포괄적으로 이뤄졌다. 요컨대 'Interest'의 영역이었던 셈이다.


인류 대학살의 속살도 기껏해야 '다름'의 문제였다. 때문에 학살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소극적이고 미약하나마 꾸준한 또 다른 '다름'도 이어진다. 수년 만에 딸네를 방문한 장모는 다섯 손주들의 훌쩍 자란 모습과 딸아이가 정성껏 가꾼 정원의 꽃들을 보며 함께 기뻐하지만, 밤이면 창문을 통해 스미는 수용소의 소음과 냄새로 불면의 밤을 보내다 결국 딸아이에게 한 마디 인사 없이 하루 아침에 짐을 싸 사라진다. 장교들의 사택마다 상주하는 유태인 하녀들 중 한 소녀는 매일 밤 위험을 무릅쓰고 산처럼 쌓인 유태인 옷가지들 사이로 사과를 꽂으며 제의(祭儀)를 반복한다. 진실로 그 찬란한 희망의 몸짓을 영화는 실제로 형광의 빛으로 처리했다. 그 장면의 배경음으로 잠자리에 누운 딸아이들을 위해 장교가 읽어주는 헨델과 그레첼의 동화가 흐르면서 마녀를 화형시키는 동화 같은 결말의 기원이 깃든 유태인 소녀의 한밤의 제의에 비현실적 간절함이 배가된다.


아무런 설명 없이 이제는 박물관 전시관이 된 아우슈비츠의 아침 일과가 청소 직원들의 일상을 통해 심드렁하게 시작되는 동안 프레임 가득 전시관 유리 진열창에 갇힌 유대인들의 낡은 신발과 옷가지 들도 심상하게 아무런 소리가 없다. 다음 장면에서 여태껏 아내의 밤잠을 깨워가며 자신의 이름으로 지칭될 작전명으로 잔뜩 의기양양해 있던 가장이 밤늦은 시간에 비로소 퇴근길을 나서다 말고 문득, 구토를 한다. 다시 전시관의 유대인 신발들이 보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던 가장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다시 구토를 한다. 그러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꼿꼿한 기세의 걸음걸이로 암흑의 복도 계단으로 사라져 프레임을 닫는다.


인류를 향한 감독의 정성스런 삿대질 앞에서 생각한다. 그러니 가끔은 물어볼 일이다.

나는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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