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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May 18. 2023

[순우여행노트 14-7] 백두산 서녘 식물 탐사를 마침

마지막 회

  북녘의 달문에 이르는 길

  15시 15분.

  내리막길을 걷기를 한 시간여, 우리는 갈림길이 있는 곳에서 오른편쪽의 길을 택했다. 매우 가파른 벼랑길을 내려가야 하는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시간을 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왼편의 내리막길을 계속 내려가면 천지의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북파(北坡)의 달문(達門)을 향하여 오르는 먼길을 다시 걸어 올라야 한다. 1km의 벼랑길을 내려가면 십 리 이상의 길을 우회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가 있다. 달문에서 북파 쪽으로 입을 벌린 칼데라 어귀. 그 안벽을 넘어 장백폭포와 달문 사이의 중간 지역으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가 선택한 길이다.

     

  표고 2,422m의 칼데라 마루턱에서 가파른 벼랑길 아래를 내려다보니 계곡 아래가 까마득하게 멀어 보인다. 경사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45도쯤의 급한 산기슭을 흘러내린 돌무더기가 벼랑을 뒤덮고 있다. ‘돌이 밀려나지 않게 조심해서 발길을 옮길 것’, ‘드러나 있는 돌부리를 절대 밟지 말 것’, ‘돌이 굴러 내리면 크게 소리를 쳐서 위험을 경고해줄 것’ 따위의 안전수칙을 되뇌며 하산을 시작했다. 수직 표고가 300m쯤의 높이이지만 벼랑길의 길이는 약 1km가 되는 듯싶었다. 엉금엉금 기듯이 내려가는 발길이 조심스럽기만 한 데 위쪽을 쳐다보면 산허리에 박혀 있는 커다란 바위 덩이, 돌무더기가 금방이라도 굴러 내릴 것만 같아 보인다.

한산길이 시작되는 곳


  그런데 그토록 경사진 북편의 산록에도 풀들은 틈을 주지 않고 피어나고 있다. 금강봄맞이(Androsace cortusaefolia Nakai, 앵초과), 구름송이(Pedicularis verticillata L., 현삼과), 아래쪽에서는 괭이눈(Chrysosplenium grayanum Maxim., 범의귀과)도 눈에 띈다.


  멀지 않은 길을 내려오는데 1시간이나 되는 시간이 걸렸다. 길을 내려와 위를 쳐다보니 금시라도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이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다.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위험한 선택을 했던 것 같았다.      

  가파른 벼랑을 내려온 곳으로부터 15분쯤을 걸어 올라 천지의 물이 흘러내리는 달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야가 썩 좋지는 않다. 천지에 내려앉았던 비안개는 천지 전체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멀리까지 비껴가 주지 않는다.


  천지(天池)의 물을 손으로 떠서 몇 모금을 마셨다. 냉장고의 물통에서 꺼내 마시는 물만큼이나 시원하다. 화산 폭발로 인하여 생긴 칼데라호인 천지는 그 둘레 길이가 14km, 그 폭과 길이가 각각 3.5km, 4.6km에 달한다. 호수는 강수 이외에도 호수 바닥으로부터 솟아나는 용출수로 약 20억 톤의 물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 면적이 약 9㎢로 그리 넓은 호수는 아니다. 수심이 매우 깊기 때문이다. 천지의 수면 고도는 2,190m이고 물이 가장 깊은 곳의 깊이는 384m, 평균 수심은 213m가 된다고 한다.   

  

  달문 연안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아래 북파 산문 입구를 향해 출발한 시각은 16시 45분. 경사가 급한 콘크리트 계단 길을 지나고 장백폭포(長白瀑布)를 지나 북파 산문 아래쪽 광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셔틀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1시간여의 시간이 걸렸다. 마천우 언덕에서 길을 되돌아 내려갔던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우리를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양 환호하며 맞이해 준다. 16명의 팀원 모두가 열 시간에 걸쳐 걸었던 20km에 가까운 거리의 백두산 서녘의 탐사 트레킹을 무사히 마친 것이었다.  

북편의 설빙

   

  서파 종주 산행을 마치며

  17시 45분, 셔틀버스 승차.

  북파 관문 안에서의 이동은 서파의 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장백산 관리소가 제공하는 버스로 이루어진다. 북파 관문 밖, 우리의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는 버스로 30여 분의 거리, 천지에서 발원된 물이 장백폭포를 거쳐 이도백하로 흘러내리는 계곡의 길을 함께 달린다.  

   

  18시 30분. 북파 관문 밖 도착. 

  우리는 문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올라 30여 분쯤의 거리를 달려 첫째 날 점심을 했던 고려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도백하 읍내에 있는 영욱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내일인 7월 3일에는 용정과 도문 지역을 여행하고, 다음날인 4일에는 심양을 거쳐 귀국하는 여정이 남아있다. 따라서 어제와 오늘 이틀간의 여행으로 우리 영월자원식물연구회의 백두산 자생식물탐사 여행은 아쉬운 막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내일의 용정과 도문 지역을 여행하는 대신 북편의 백두산을 탐사했으면 하는 생각은 나만의 욕심일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더 보고 싶은 백두산의 모습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금번 우리가 백두산 탐사를 마치고 난 뒤 누군가가 백두산이 어떤 곳인지를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단 이틀 동안의 짧은 기간에 한쪽 면의 극히 제한된 공간의 백두산을 보고 나서 백두산이 이렇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유구한 세월을 거기에 존재했고 지금의 이 순간에도 쉬지 않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는 거대한 영역의 자연 세계인 백두산. 우리가 본 백두산의 모습은 그저 신묘한 또 다른 하나의 세계라고밖에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천지가 보이는 산마루에서

  

  백두산에는 우리가 함께했던 7월의 초여름 이틀 이외에도 수없이 반복되고 또다시 되돌아올 계절들의 수많은 날과 뒤이어올 다시 찾아올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이 있다. 또 이곳엔 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수, 골과 골에서 흘러내리는 물길과 강이 있다. 천지에 비쳐 내리는 하늘과 해, 그리고 달이 있고 거대한 봉우리를 감싸 안는 넓고 무성한 숲, 산 정상 끝까지 연이어 오르며 뿌리를 내린 수많은 풀과 나무들이 있다. 그것은 너른 언덕의 푸른 초원을 만들기도 하고 깊은 벼랑의 돌무더기, 바위 덩이를 감싸 안기도 한다. 큰 봉우리를 솟구쳐 올리기도 하고 깎아내린 듯한 절벽의 협곡을 파내기도 한다. 백두산은 호랑이, 반달곰, 수리, 우는토끼와 산돼지 따위의 온갖 동물과 곤충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만의 느낌과 기운을 담은 바람, 비와 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백두산에는 이렇듯 참으로 넓고 큰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는 경이로운 것은 백두산이 품어내고 있는 다양하고도 다채로운 생명체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백두산은 자신의 구석구석 한 조각의 빈틈도 남김없이 무수한 생명체들을 보듬어 안고 있다. 바위와 돌무더기가 있는 곳엔 푸른 이끼가, 흙이 있고 햇살이 비쳐드는 곳엔 어김없이 또 다른 푸른 생명체들이 다투어 피어난다. 2,500m가 넘는 높은 준봉에도 그토록 많은 풀꽃과 나무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을 줄이야. 칼데라 맨 위의 끝자락, 한 줌의 흙무덤에도 풀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햇살이 비쳐들지 못할 만큼 두텁게 우거진 나무숲 아래의 빈터에도 또 다른 작은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곳엔 그 어디에서보다도 더 강한 생명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작은 풀꽃과 나무들의 바다, 끝 간 데 없이 산허리를 타고 돌며 굽이치는 녹색의 물결, 그곳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과는 또 다른 곳에 그들만의 특별한 삶, 신비로운 공간, 아름다운 풍경, 경이로운 생명의 세계가 있다.  

   

  이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공간을 우리에게 선사한 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이 중국의 땅에 있든, 우리의 땅에 있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이번의 여행으로 백두산의 서편을 올랐으니 동편의 백두산을 오를 수 있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고대해 본다. (200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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