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우리와 또 다른 면에서 너무도 많이 닮아있는 것은 아마도 중국과의 관계일 것이다. 역사가 있어 온 이후 결코 소홀해질 수 없었던 것이 우리와 베트남 모두의 운명과도 같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지정학적인 관계라는 것이 바로 중국과 베트남,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유사성은 아주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우리나 베트남 모두 중국과 폭넓은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일본을 향해 진출하는 경로에 있고 베트남은 그가 인도차이나반도로 발을 뻗치는 통로에자리해 있다.
중국의 세력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시기 우리와 베트남 모두는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제로 베트남의 경우에는 그들의 역사를 통해 모두 2번에 걸쳐 1,000년이 넘는 아주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거대한 중국의 힘은 정치․군사적인 면에서보다도 어쩌면 문화․사회적인 면에서 베트남과 우리 양쪽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싶다. 줄곧 밖으로 흘러넘친 중국 문화와 문명의 영향은 이른바 한문화(漢文化)라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 권역이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그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와 철학, 문자나 언어는 물론 국가 제도, 사회적 가치와 전통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중국에 온 베트남 사신들의 모습을 조선의 사신이 그린 그림(자료: 나무위키)
문화의 발전을 설명하는 이론의 하나로 ‘물방울론’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이 잔잔한 호수에 하나의 돌을 던져서 둥그런 물결을 만들게 되면 그 돌이 떨어진 바로 근처에 생기는 물결은 크기도 작고 물결의 높이도 더 낮지만, 이 물결이 바깥쪽으로 퍼져나갈수록 그 크기가 커지고 물결의 높이도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즉, 어떤 문화나 문명이 크게 융성하여 그것이 그 주위의 외부로 전파되게 되면 역설적으로 그 파장의 힘은 거리를 멀리할수록 더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 외부로부터 자발적으로 흡수해서 받은 영향은 정작 그 영향의 근원이 되는 뿌리를 내린 곳에서보다 주변에서 그 영향을 받는 곳에서 더 오래, 그리고 더 강하게 그 모습을 남겨두게 된다는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는 서양의 강력한 힘과 문화가 동양 지역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서세동점(西勢東占)이라는 현상으로 서구의 나라가 동양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 그 문화가 전파되기도 했다. 우리나 베트남 역시 그런 현상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지만, 중국의 절대적이었던 정치와 군사, 문화의 힘이 우리에게 끼쳤던 영향의 모습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주 쉬운 예로 한자가 끼친 우리와 베트남의 언어에 대한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나 베트남 모두 각자가 고유의 말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이를 잘 지켜 나올 수는 있었지만, 우리 한국어나 그들 베트남어의 밑바탕에 한자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감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한자의 感謝를 뜻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베트남어에서 같은 뜻의 ‘깜언(Cam on)'은 마찬가지 感恩이라는 한자어가 바탕이 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중국으로부터 한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나 일본의 경우 그 글자의 형태를 거의 조금도 바꾸지 않고 원형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지만, 중국은 획수가 많거나 쓰기 어려운 글자의 경우 이를 많이 축약해서 이른바 ’간자체(簡字體)‘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문화전파의 물방울론’에서와 같이 중국보다는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에서 우리 한국에서보다 원형의 한자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우리보다 한자를 얼마나 더 많이 즐겨 쓰는가는 그들의 신문이나 잡지 하나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같은 한반도이기는 하지만 중국보다 좀 더 먼 곳에 있는 우리가 북한보다는 더 즐겨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는 그들이 우리 남한의 사람들보다도 한자보다는 그들의 토박이말을 더 많이 즐겨 쓴다는 사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모자음(母子音) 자체를 알파벳 바탕의 글로 쓰고 있는 베트남어인 ‘띠엥 비엣(Tiếng Việt)’의 경우 그들 글자의 60% 정도가 한자(漢字)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다. 그런데 한자의 영향이 오늘날 그들의 실생활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제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특징적인 유적이나 문화유산을 둘러보건대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한편 두 나라 모두가 열강에 의한 식민통치를 받고 난 이후 똑같이 이념의 분쟁과 체제 경쟁으로 인하여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뼈아픈 시련을 겪어내야만 했다는 점은 참으로 기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우리보다 더 길고 참혹한 전쟁으로 더 많은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우리에 앞서 통일을 이루고 새로운 그들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우리나 베트남이나 서로 비슷한 남북분단의 경험을 지니고 있지만, 각자가 지니고 있었던 분단의 속내가 크게 달랐다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베트남이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지만, 제네바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베트남 또한 남북 양측이 합의했던 남북총선거가 남측의 일방적인 거부로 무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선거에서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 남측의 정치지도자들이 약속을 깬 것이었다. 이렇게 깨진 약속은 결국 20년 긴 세월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왔고 양쪽 모두의 엄청난 피해와 상흔을 남긴 뒤 북쪽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1954년 제네바협정과 함께 남과 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자료: 위키피디아)
이와는 달리 우리의 분단이 지금까지도 고착된 것은 베트남의 경우와는 달리 유엔의 결정에 따라 추진되던 남북총선거 계획을 북측이 일방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 남측이 아닌 북측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계산에 의한 약속 파기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한 정치적 계산은 625 한국전쟁의 동족상잔의 참극을 초래하고 이제껏 우리의 강토와 혈육들을 서로 갈라놓고 있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베트남의 경우 공산이념의 북측이 그래도 여유와 관용을 가지고 민족의 문제에 접근했던 데 비해, 우리의 경우 자유민주진영의 남측이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 베트남과는 그 결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유와 관용을 베푸는 측이 나름 힘과 자신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도 싶지만 말이다.
나는 베트남의 남북이 이념적으로 최고의 극단적인 상황에 있었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남북 간의 서신 왕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베트남 사람들의 유연한 사고와 인도주의적 관용에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 공산당의 고위직에 있던 한 당료(党僚)는 그와 같은 서신의 왕래가 북측의 주도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그와 같은 교류가 그나마 분단된 민족의 일체성을 지켜나가는데 한 가닥 희망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당료는 당시 남북 간의 이념과 체제 경쟁이 인도주의적인 가족 간의 관계까지 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서로의 안부 이외에 어떠한 다른 말도 쓸 수 없도록 하고, 엽서형태의 편지를 쓸 수 있는 글의 줄 수를 3줄 이하로 제한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직도 편지 한 장은커녕 단 한 줄의 엽서도 서로 주고받을 수 없는 우리의 참혹한 현실을 우리는 그들과 과연 어떻게 비교해 볼 수 있을지...
이렇게 우리와 베트남의 모습을 살펴보면 서로가 비슷한 지리적 환경과 와 경제 여건, 일부러 그렇게 만들려고 하더라도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이 서로 닮아있는 문화와 역사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각각이 다른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생각은 어떨까. 얼마나 서로를 닮아있을까?
솔직히 처음으로 만나는 베트남 사람들의 태도는 싸늘한 느낌이 숨어 있지 않고 말하기 어렵다. 한때 그들과 맞서서 생명을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우리가 아닌가. 우리에 대한 감정이 분명 북쪽 하노이에서 사는 사람들과 남쪽 호찌민에서 사는 사람들과 조금은 다르다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북쪽 사람들의 느낌이 처음에 조금은 더 서먹하게 느껴진다. 북쪽의 사람 중에서도 전쟁에 참여한 참전 용사인 경우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내가 살던 아파트 근처에서 작은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하고 있던 카이(Khai)씨는 베트남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참전 상이용사였다. 내가 자전거 한 대를 빌리기 위해 그의 수리점에 들렀을 때 그는 매우 싸늘한 태도로 나의 이력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아닌가! 그가 한참 더듬거리는 영어로 나에게 말했던 것 중에서 가장 거슬렸던 것은 그가 우리 한국을 그들이 통상 우리를 지칭하고 있는 ‘한 꾸억(Han Cuoc)’이라는 말 대신에 북한을 지칭하는 조선이라는 의미의 ‘찌우 띠엔(Trieu Tien)’이라는 말을 썼을 때였다. ‘당신은 북조선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가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상이용사라는 점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의 자못 냉담한 태도에 더욱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같은 가계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던 토앙(Thoang)이란 분의 이를테면 중재에 따라 자전거는 빌릴 수 있었지만 마음이 썩 개운할 수는 없었다.
맨 처음 두 시간 정도의 자전거를 빌리는데 그 점포의 주인인 카이씨는 미화 2달러의 대여료와는 별도로 70달러의 예치금을 요구해왔다. 내가 빌릴 수 있는 자전거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중고였지만 그는 내가 빌린 자전거를 반납하지 않는 경우 새 자전거를 대체해서 살 수 있는 만큼의 충분한 보증금을 요구한 것이었다. 어차피 돌려받을 돈이기에 나는 그가 제시한 조건으로 70달러의 돈을 별도로 건넨 뒤 아무 군말 없이 그 자전거를 빌리기는 했다.
나는 그 이후 주말의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자전거도 타고 시장 구경을 하기 위해서 나의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카이씨의 자전거점에 들러 자전거를 빌렸다. 기분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서로 간에 거래를 튼 상태였고, 두 시간에 2달러라는 자전거 대여료는 사실 돈이 되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쪽도 그 거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두 번째로 그의 가게에 들러 자전거를 빌리고자 했을 때도 카이씨의 태도는 결코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첫 번째의 거래 시와 똑같은 조건을 요구를 해왔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두 번째로 다시 그로부터 자전거를 빌렸다.
그런데 다음 주 내가 그에게 다시 자전거를 빌리기 위해서 그의 가게에 갔을 때 그의 태도가 몰라보게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내가 조금 더 놀라게 된 것은 이제부터는 70달러의 보증금은 낼 필요가 없다는 그의 말을 듣고서였다. 그 사이에 정이 든 것일까? 짧은 기간이지만 서로 간에 신뢰가 쌓였던 때문일까?
여하튼 나는 그 이후 여러 차례 그의 가계에서 자전거를 빌리는 단골의 고객이 되었고 어쩌다가는 그와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언어의 문제로 서로가 충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애써 그의 힘들었던 과거의 아픔을 잊고 나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1997.10)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