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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Jul 13. 2023

[순우여행노트 22] 호찌민 아저씨(1)

     

  베트남에서 생활하면서 베트남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를 유심히 본 사람이 있다면 무엇인가 느낀 점이 있을 것이다. 지폐의 지질이 좋지 않아 쉽게 보풀이 지는 느낌이 드는 것도 특이한 점의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지폐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을 보면 여러 종류의 지폐 모두가 한 사람의 초상화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초상화의 주인공이 바로 지금도 ‘아저씨 호찌민’으로 불리고 있는 ‘빡 호찌민(Bak Ho Chi Minh)’이다. 우리에게는 월맹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국가 지도자인 호지명(胡志明)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베트남에서 통용되는 지폐는 당시에 5만 동(Dong), 그리고 2만, 일만, 이천, 일천, 이백 동 등 모두 여섯의 종류였는데 이 여섯 가지의 지폐 모두는 호찌민의 초상화가 담겨있다.

     

  안타깝게도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그가 숨을 거둔지가 내가 하노이에 머물고 있을 당시가 1997이니 이미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호찌민에 대한 기억을 어제의 일같이 떠올리며 그를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듯하다. 또 쉬운 예로 베트남 사람들은 아직도 관공서의 회의실 같은 곳에는 그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다. 하노이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에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주었던 조언이 기억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유가 있다면 호찌민의 생가가 있는 네안(Nghe An)성을 다녀오거나 그렇지 않다면 하노이 시내 중심부의 광장에 마련되어 있는 호찌민 능묘(Mausoleum)에 안치되어있는 호찌민 묘소를 방문해서 참배하라는 것이었다.


  프랑스에 의한 식민지배 시대 중간쯤의 시점인 1890년 베트남 중북부 지방의 주요 도시인 빈(Vinh)시의 근교인 킴리엔(Kimlien, 金蓮)이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호찌민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베트남의 국부(國父)이자 베트남 국민들의 위대한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시대와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변함없이 추앙되고 사랑받고 있다는 점이다.     

호찌민(1946년 자료: Wikipedai)

  이렇듯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깊고 뚜렷하게 살아있는 호찌민은 공적인 비즈니스 대화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한 번쯤은 화제에 오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인의 경우 그가 호찌민의 생가가 있는 킴리엔 마을을 방문했다는 것만도 베트남에 대한 충분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베트남 사람과의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한다. 또 베트남 사람들은 각자의 나름대로 변함이나 예외 없이 그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거나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고는 한다.     


  호찌민이 이토록 많은 베트남 사람들의 무한한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없지 않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가 그 누구보다도 더 그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의 소명을 다했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또 아직도 ‘호 아저씨(빡 호, Bak Ho)’라고 불리는 호찌민이 생전에 그가 어떤 우상으로 받들어지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누구보다도 검소한 삶을 살았다는 데 대해서 이견을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그가 죽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옷 한 벌만 남겼을 정도로 매우 검소했다는 다소 과장된 그들의 말만 듣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호찌민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공산주의자이기는 했지만 많은 역경을 이기고 조국의 독립과 자주, 하나 되는 나라의 믿음을 가지고 오랫동안을 싸워 나온 베트남 사람들에게 불굴의 투혼과 정신, 지혜로운 전략과 전술로써 이들을 훌륭하게 이끌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삶이 사후에도 변함없이 빛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그가 끝까지 변치 않고 견지해 나왔던 극히 평범하고도 검약한 생활의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그가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과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그들 모두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호지민 주석 집무 모습(자료 다음카페 namganda)


  특히 그는 일본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과 함께 인도지나반도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선포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주석으로 취임한 이후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숨을 거두기까지도 그가 내세우는 이른바 ‘3꿍(Cung)의 정신’을 몸소 한결같이 지키며 실천했다는 것이다. 3꿍의 정신이라고 하면, 그 첫째가 ‘꿍 아(Cung A)’, 함께 산다는 것이며, 그다음은 ‘꿍 안(Cung An)’, 함께 먹는다는 것이고, 마지막 셋째가 ‘꿍 담(Cung Dam)’,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이나 마음은 ‘애국(愛國)’, ‘보국위민(保國爲民)’이니 ‘멸사봉공(滅私奉公)’이니 하는 거창한 것들이 아닌 아주 평범하고도 실질적인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자세는 언제나 한결같았는데 누군가로부터 이와 관련된 아주 인상적인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40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만의 언론기자단이 호찌민이 국가주석으로 있는 사무실을 찾아서 그와의대담을 진행했던 때의 일화다. 지금도 호찌민 능묘 뒤쪽의 유적공원에는 호찌민주석 생전의 집무실이자 숙소였던 시설이 ‘호지명고거(胡志明故居, Ho Chi Minh's House-on-Stilts)’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다.      


  나도 가족과 함께 한 번 찾은 적이 있던 그 유적 중에는 그가 회의실과 집무실로 사용했다는 건물 하나가 있었다. 다른 건물들도 모두 비슷했지만, 대나무 쪽으로 벽을 엮고 초가로 지붕을 씌운 작은 집이었는데, 회의실의 크기는 모두 10명 정도가 않을 수 있는 작은 공간으로 중앙에 놓여있는 탁자와 그 탁자를 둘러 놓여진 작은 의자들이 전부였다.      


  대만의 기자단이 호찌민 주석을 찾아온 것은 아마도 이 회의실이었을 듯싶다. 40명 모두의 기자들이 그 방에 모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란 걸 판단한 호 주석은 회의실 안에 있던 탁자와 의자를 모두 들어내고 맨바닥 위에 그냥 앉아서 모든 기자를 함께 한 방에서 맞을 수 있었다고 한다. 누구나와 함께 서로 가깝게 살아가면서 함께 일하는 것을 아주 쉽게 보여준 일화가 이날 수 없다. (.. 계속) (2003.9.6)  

호찌민 능표(자료: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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