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풍경
퀴논(Quy Nhon)에서 출장 업무를 마치고 하노이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항공일정 상 호찌민을 경유하는 것이 편리했다. 금요일에 일을 마쳤는데 일요일에나 있는 하노이행 비행기를 타려면 외니 하루를 기다려야만 했다. 마침 토요일 이른 아침에 있는 호찌민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일요일 저녁의 하노이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의 이틀 동안을 호찌민 관광에 할애하기로 했다.
호찌민에서의 안내는 미리 ‘신 카페(Sinh Cafe)’라는 여행사에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었다. 또 호찌민에는 이미 몇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다. 시내 지역은 이미 돌아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호찌민 지역 메콩(Mekong)강 지류의 하나인 미토강(Song My Tho) 지역을 돌아보기로 했다. 미토강을 선택한 것은 꼭 한번은 메콩강 하류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미토강은 9개의 지류로 되어있는 메콩강의 최 하류 지역으로서 호찌민에서 가깝기도 하고 물의 흐름이 많은 곳인 때문이었다.
미토 지역 관광을 마치고 저녁 늦게 호찌민으로 돌아와 하루를 묵고 난 이튿날은 일요일인 4월 30일. 그 해가 1997년이었으니까 우연하게도 그날은 22번째를 맞이하는 이른바 ‘사이공 해방기념일’이었다. 사이공(Saigon)은 베트남 통일 후 호찌민(Ho Chi Minh)으로 이름을 바꾼 과거 프랑스 식민 치하와 자유 월남의 수도였던 곳, 한때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던 도시였다.
미토강으로 가는 길목의 어느 작은 마을의 관공서 건물에는 ‘Tang Cong San Quang Vinh Muon Nam’, 즉 ‘공산당이여 무궁하여라’라는 뜻의 프랑카드가 걸려있기도 했다. 여행가이드 구엔 칵 칸(Nguyen Khac Khanh)씨는 이 프랑카드가 사이공 해방기념일을 즈음해서 내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호찌민 시내에서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좀 색다른 모습이라면 유독 그 색깔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국기가 집집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걸려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구엔씨의 설명으로는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념식은 물론 시가행진 등의 화려한 행사가 펼쳐지고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국기를 내다 거는 것 말고는 특별한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제 해방의 의미가 퇴색되어 더는 기념할만한 가치를 상실해버린 것일까?
다행히 베트남은 통일을 이루어 이념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영토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벌써 한 세대가 되는 만큼의 시간을 통일된 나라로 살고 있다. 아직도 분단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베트남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얼핏 보더라도 어느 다른 나라 사람들 못지않게 수많은 파란과 역경의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역사를 그리 멀리 되돌아보지 않더라도 그들은 너무도 가슴 아프고 쓰라린 고통과 상처를 많이 안고 있다.
그들이 오랜 역사를 만들어 나오며 겪었던 가장 큰 고통과 상처는 대부분 외세의 강압으로부터 빗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근세에 겪어야만 했던 그들 동족 간의 처절한 갈등과 참혹한 상잔(相殘) 역시 그들은 그것이 외세의 입김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변치 않는 믿음을 갖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나라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베트남 역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과 베트남은 그 관계가 워낙 가깝고 긴밀해서 마치 이빨과 입술과도 같은 순치(脣齒)의 관계에 있어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트남과 중국은 1,000Km에 달하는 국경선을 서로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 인접성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중국의 남방진출 요충으로써 그의 강력한 정치․문화적인 영향과 간섭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때로는 베트남이 중국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그들의 주권을 찾기 위해 중국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오기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또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그를 견제하기도 했지만, 많은 세월 동안을 그의 그늘을 마다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살아 나왔다.
베트남은 기원전 2세기 중국의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정복당한 이후 10세기 초반에 이르는 1,000여 년의 동안 중국의 통치를 받았다. 당(唐)나라가 멸망하는 혼란을 틈타 939년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은 그 이후 15세기 초 다시 중국의 명(明)나라에 20년간 다시 복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939년 오吳왕조가 수립된 이후 정丁, 레(Le,黎), 이(Ly,李), 쩐(Tran, 陳), 후기레 왕조를 거쳐 1802년에 수립된 원(Nguyen,阮)왕조가 불과 50여 년 후인 1859년 프랑스에 식민영유권을 양도하기까지 900여 년 동안 국통(國統)을 이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도움으로 수립된 원왕조의 미래는 서구 열강이 각축을 벌이던 19세기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 이미 결정되어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중반 원왕조가 몰락하면서 약 100년에 이르는 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은 베트남은 외세의 지배를 받은 모든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경제가 수탈됨은 물론 그들 사회와 문화가 변화되는 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은 한때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했던 일본의 통치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2년도 되지 않는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이 당시의 고통을 그 어느 때의 일보다도 무서운 악몽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쟁의 와중에서 겪어야만 했던 혹심한 흉작과 점령군의 수탈과 무자비한 숙청으로 인해서 빗어졌던 극심한 기아와 살상은 그들이 그 어느 때의 고난보다도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역사의 어두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베트남도 해방과 통일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의 또 다른 열강의 각축은 그들을 순수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영국 및 프랑스는 남부 베트남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자유민주 정권인 월남(越南)의 수립을 도모하고, 소련과 중국은 북부 베트남을 터전으로 공산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이른바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월맹(越盟)의 수립을 도모케 하였다.
이와 같은 남북의 대립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 직후 일어난 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다. 이 전쟁은 1954년 베트남 북부의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남부 베트남의 후견인 세력이었던 프랑스군이 공산주의 세력인 베트민에 패퇴하면서 제네바에서 체결된 정전협정에 양측이 서명함으로써 종결되었고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반도로부터 완전히 철수하였다.
한편 1954년에 체결된 제네바협정에 따라 2년 안 남북의 자유 총선거에 의한 합법적인 통일 정부 수립의 꿈은 남측이 자유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양측의 불신과 대립은 무력의 충돌로 이어졌고 다시 20년 가까이 계속된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월남전의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다. (... 계속) (200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