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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Sep 18. 2023

[순우여행노트 30] 이웃나라 중국(1)

또 다른 중국 중화민국

  1982년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하면서 찾은 나라가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 대만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 나라 중국(中國, People’s Republic of China)이 우리에게는 아직 문호를 개방하기 않던 때였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중화민국 대만(Taiwan)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해외여행을 하기가 그리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첫 해외여행이었기에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기분은 들떠 있었고 무엇이든 새로운 모습에는 쉽게 눈을 빼앗겼다. 그런데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Taipei)에서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렇다 할 만한 이국적인 모습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그 모습이 서울의 도심 모습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리와 건물의 한자로 된 표지판이나 간판의 모습을 빼고는 말이다. 


  그러나 도시를 둘러보면서 무엇보다도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 도시가 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대만이 ‘국립고궁박물관’이라고 이름 짓고 그들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던 곳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던 무진장한 문화재 거의 모두가 장개석(蔣介石) 정부가 대만으로 패퇴해 들어오면서 중국 본토로부터 옮겨온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 집단이 대장정을 통해 기사회생하여 세력을 키우자 장개석 정권은 중국 본토로부터 일본 세력을 함께 몰아내기 위해 모택동과 이른바 국공합작이라는 대의의 협력을 이끌어 냈다. 그런데 국가의 정통성이나 병력의 숫자 등 여러 면에서의 절대적인 우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은 공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모택동의 세력에 의해 1939년 대만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인민의 해방을 외치며 들고 일어선 모택동의 민중에 의해 장개석의 구체제는 무력하게 무너져버렸다.

 

  한 시를 다투어 쫓기는 신세가 된 구체제의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그러한 와중에서도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많은 문화재를 모두 온전하게 보전하여 그곳의 국립고궁박물관에 정성들여 보관하며 전시하고 있었다. 마치 군사적인 요새와도 같이 느껴지는 산 숲 아래에 숨겨지듯 자리한 웅장한 건축물의 박물관은 그 규모 또한 적지 않았다. 그곳에 보관 전시되는 문화재의 숫자는 수십만 점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보관되어있는 유물들을 순차적으로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전시하려면 수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했다. 


  장개석 정권이 국공합작에서 패퇴한 이후 대만으로 쫓기고 있던 상황이 어느 정도로 급박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들 자신의 귀중한 유물과 문화재를 보존해야만 한다는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가솔 식솔을 챙기는 것만도 여의치 않았을 텐데 그것들을 옮겨 오는 것은 어쨌거나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유물(遺物)들을 유물론(唯物論)을 찬양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유물을 옮겨 지키는 것이 곧 그들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지키는 일이라는 의지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껏 지쳐서 길을 걷고 있는 피난민들에게 무거운 책 보따리를 떠안기는 것과도 같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게 쉽게 풀리지 않는 의문의 한 가지는 어째서 모택동 세력은 그들의 그 많은 귀중한 문화재를 옮겨가는 것을 보고만 내버려 두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패퇴하여 쫓기고 있는 패배자에 대한 나름의 관용이었을까? 아니면 중국인 특유의 대국적인 포용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을 이들 문화유산을 도외시했거나 무관심했던 때문이었을까? 또 한 가지의 의문은 만약 그 문화유산들이 대만으로 옮겨지지 않고 중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과연 그 이후에 벌어진 2차 세계대전과 문화혁명과도 같은 격변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들이 모두 온전하게 남겨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자료: Wikipedia) 

  참으로 진귀한 여러 가지 보물과 문화재들을 넋을 놓고 관람했던 그때의 흥분을 나는 지금에 와서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아직껏 나의 기억에 남는 매우 인상적인 유물 중의 하나는 ‘다층구(多層球)’라는 이름의 공예품이었다. 겉의 모습은 용의 문양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져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큰 주먹만 한 크기의 그 상아 구슬 속에는 10여 개가 넘는 각각의 둥근 조각품이 층층이 들어앉아 있었다. 구슬 속에 켜켜이 들어 있는 각각의 조각품들은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서 각각의 둥근 구체는 작은 칼 조각과 구멍으로 무수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맨 안쪽의 각각의 층을 이루고 있는 정교하기 그지없는 각각의 구체는 열 개의 켜도 넘는 속 안의 조각 모습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신비로운 구조로 되어있었다. 


  이 작은 하나의 공예품은 나에게 이른바 대중유소(大中有小) 또는 소중유대(小中有大), 즉 ‘큰 것에 작은 것이 있고, 작은 것에 큰 것이 있다’라는 중국적 사고와 문화, 철학적 역설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중국 하면 무엇이든 크다고만 생각했던 내 생각에 대해 그토록 섬세하고 정교한 상아 구슬 하나는 내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나중에 어느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었지만 중국에는 그보다도 더 미세하고 정교한 공예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상아로 만든 다층구의 하나(자료: 네이버 블로그)

  이것은 청나라의 조각가가 ‘감람(橄欖)’이라고 하는 중국의 올리브나무 열매로 만든 조각품인데 ‘감람각주(橄欖刻舟)’라는 이름의 것이었다. 열매의 과육이 제거된 열매의 속 알맹이 감람에 새긴 배, 감람각주. 길이가 3.4cm, 높이 가 1.6cm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배 모양으로 이 열매를 깎아 그 안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섬세한 조각을 완성한 것이었다. 그 작은 배 모양 안에는 8명의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과 8개의 문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배의 밑바닥에는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적벽가 전문 357개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또 한 차례 대만을 방문하고 몇 차례 중국을 여행하면서 받을 수 있었던 인상적인 것은 그래도 그들의 작고 섬세한 모습보다는 크고 웅대한 모습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구 12억 명, 국토면적이 우리 한반도 전체의 44배나 더 큰 나라 중국. 중국은 일단 이 나라의 가장 손쉬운 인문지리적인 통계 숫자 자체를 당최 가늠하기가 어려운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식상할 수도 있겠으나 중국은 세계 인구의 약 5분의 1, 그 영토가 지구 땅덩이의 약 15분지 1을 차지할 만큼 광대한 나라다. 한때 세계의 중심과도 같은 찬란한 문명과 부강한 국가를 이루었고 그들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불리기를 바라는 나라다. (계속...) (2003.9.24.)

중국올리브나무 열매 감람.  이 열매의 속 알맹이로 감람각주를 만들었다.(자료: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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