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시시 해맑게 웃는 아들의 얼굴을 본다. 나는 쇼퍼에 앉아 책을 읽는다. 아들은 내 발 아래에 앉아 종이접기를 한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들이 세상을 다 가진듯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뭐가 그리도 좋니?"
"엄마랑 같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리고 곧 있으면 누나도 오잖아요."
"그게 좋아서 그리 웃는거야?"
"네!"
마침 내 손에 들려진 책은 소펜하우어의 행복에 관한 책이다.
'참 타이밍 오묘하네. 책을 읽고 있는건 나인데 너는 이미 세상을 다 깨우친 듯 웃고 있구나.'
'한참 어린 너에게 참 많이 배운다. 엄마는'
한달 넘게 집안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들은 이 시간을 군말없이 잘 견뎌주고 있다. 심심하다고 보채지도 않는다. 나가자고 조르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은 소펜하우어 보다 아들이 나에게 현인이다. 어쩜 저리도 잘 참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당장이라도 숨이 턱턱 막히는 대도 말이다.
(혹씨, 극 I ?)
사람들은 왜 '행복'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로 '행복'에 집착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일까? 역설적이지만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자신 '내면의 욕망' 을 쫒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이 '행복' 의 끝일 거라고 믿으면서.
'돈은 쫒아가면 않된다. 돈이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 는 말이 있다.
그러면 행복은?
행복 또한 쫒을 수록 멀리 달아난다고 이야기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 한다. '행복은 쫒아야만 잡을 수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정의 의 기준은 그 끝이 매우 모호 하다. '행복' 이라는 단어는 매우 주관적이다. 내 경험상 행복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행복은 저절로 따라오는 결과값도 아니었다. 내가 노력하고 얻어내야 하는 '마음의 숙제' 였다.
마음의 숙제
나는 바보같은 현자가 될 수가 없다. 바보같은 현자가 되기엔 욕심이 과하다. 현명한 현자 도 될 수가 없다. 현명한 현자가 되기엔 난 절대적으로 현명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마음의 숙제를 풀어야 하는 행복에 대한 나의 '조건' 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