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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lopenspirits Apr 03. 2024

수영장 텃세

휴직 92일 차

     모두가 단장을 마치고 나간 탈의실에 나와 한 할머니만 남았다. 수영복을 드라이기로 말리고 있었는데 옆에 계신 할머니가 드라이기 말고 선풍기를 켜서 그 위에 널어놓으라고 하셨다.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으로 말리면 수영복이 금방 상한다고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하며 선풍기에 널었다.


     그렇게 말을 튼 할머니는 너무 고우셨다. 화장품도 나보다 많았다. 곱게 화장을 한 후, 머리까지 롤빗으로 정성스레 말리고 스프레이로 세팅까지 하셨다. 뒤꿈치에는 바셀린까지 바르셨다. 너무 고우세요~라고 하자 할머니는 쑥스러우신지 어차피 집에 가면 잘 거인데 왜 이렇게 화장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며 웃으셨다.


     할머니가 말해준 일과다. 매일 아침 수영을 하고 마치면 점심시간이다. 친구들과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고 차 한잔을 하고 집으로 가면 3시 정도라고 하셨다. 잠시 눈을 붙이고 쉬다 보면 5시부터 가족들이 하나둘씩 들어온다고 한다. 한 집에 삼대가 살고 있다고 했다. 아들 부부와 손주들. 며느리가 여럿인데 한 며느리가 손주를 넷이나 낳았다고 했다. 손주 넷은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처음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가르치고 적응시키느라 고생했지만 지금은 다들 잘 자라서 이젠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셨다. 가족들이 돌아오면 저녁을 해서 먹이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고 하셨다.


     와, 정말 알찬 하루예요. 저 나중에 선생님처럼 살고 싶어요~라고 했더니 호호호 웃으셨다. 수영복이 대충 말라서 집어 들고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고 인사를 했더니 내일 봬요라고 대답해 주셨다. 사실 내일은 수영을 가진 않지만 그냥 네~ 하고 대답했다.


     악명 높은 수영장 텃세를 많이 들어서, 오전 시간대에 등록을 하고서는 내심 걱정을 했다. 새벽반은 직장인들이 대부분이라 각자 운동하고 출근하기에 바빠서 텃세라곤 느낄 틈이 없었다. 하지만 오전 시간은 주부님들이 많을 것 같았고 실제로 그랬다. 쫄은 나는 알아서 붐비는 샤워시간을 피하고, 알아서 구석으로 가 샤워를 했다. 좀 시끄러운 사람들은 있었으나 샤워자리나 화장대 자리, 드라이기 쓰는 순서로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 애초부터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던 게 그분들은 이미 수영고수라서 다섯 번째 레인을 쓰고, 나는 수린이라 첫 번째 레인에서 음파음파 발차기만 하니 마주칠 일도 별로 없다.


     텃세란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특권 의식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졌다. 오늘 만난 할머니의 텃세라면 본받을만했다. 나이가 들어 젊은 사람과 같은 몸매는 아니지만, 매일 아침 수영으로 다져진 몸, 아이크림을 약지로 꼼꼼히 바르고, 뒤꿈치처럼 놓치지 쉬운 곳까지 신경 쓰는 모습, 무엇보다 기분 좋은 참견을 곁들인 스몰토크를 건네는 여유. 나도 매일 아침 수영을 하고, 낮잠도 예쁘게 자는 고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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