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112일 차
지워버렸다. 아무 스케줄이 없어서 오늘은 뭘 하고 시간을 보낼지 고민했다. 한강에 가서 누워있을까, 북카페를 가볼까, 아니면 백화점에 가서 가구를 구경할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옷도 여러 벌 입고 벗었다. 날씨가 좋은 날을 기다리며 다려둔 핑크색 원피스를 걸쳐봤지만 오버란 생각이 들었다. 펜슬스커트를 입었는데 아무래도 활동하기 불편할 것 같아서 다시 벗었다. 결국 마지막에 결정한 건 또깅스. 또 레깅스에 엉덩이까지 오는 니트를 입고 대충 가방을 둘러맸다.
나가기 싫었다. 어제까지는 오늘을 기다렸다. 계획된 일이 아무것도 없는 하루를 말이다. 곧 있으면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데 그땐 이렇게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과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을 답답한 사무실에서 보내야 한다. 그러니 즐길 수 있을 때, 평일 낮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말엔 항상 사람이 붐비는 장소를 한가한 평일 낮에 미리 가둬야 하고, 해를 듬뿍 받을 수 있는 시간대에 바깥 활동을 해서 세로토닌도 생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후회를 안 하지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나가기 싫었다. 좀 뒹굴 거리다 보면 이따 저녁에라도 나가고 싶어질까 싶어서 옷도 그대로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한 채로 잠시 침대에 누웠지만 바로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서 화장을 지워버렸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에서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는 내리 잤다.
휴직 초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가 싶었지만 그냥 이런 날도 있는 거지 했다. 언제나 주말 계획이 있었으며 일단 한번 나가면 그동안 모아뒀던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한 동선을 짜는데 도가 텄다. 쉬는 날엔 뭐라도 해야 평일을 보상받고, 시간을 빈틈없이 쓰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오늘 역시 억지로 나가서 뭐라도 하고 올 수도 있었는데 그냥 유튜브나 보고 빵이나 먹고 잠이나 자고, 그리고 이걸 계속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