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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동안남 Oct 15. 2023

주제 : 어린 시절, 추억의 미용실 이야기

동안이자 미인이셨던 미용실 원장님의 모습을 보면서 남기는 글

내가 살던 동네에 꽤 멋진 미용실이 있었다. 당시, 동네 주변에는 여러 이발소와 미용실이 있었는데, 유독 우리 어머니께서는 집에서 가까운 미용실을 이용했다. 상호명 골든 미용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어봤다. 왜, 이 미용실이 좋은가요?


어머니께서는 "이 미용실이 머리도 잘 손질해 주고, 서비스도 좋아서 만족스럽다. 너도 같이 가자." 


당시, 내 나이 유치원 지나 초등학교에 들어간 8살...... 나는 유치원 시기 때 머리카락을 자른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부터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항상 그 미용실을 방문했다. 1달에 1번 아니면 2번씩 말이다. 그런데 나는 당시에 미용실 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아니,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 자체가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매일 혼나고, 잔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갔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나. 여전히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귀찮다. 버릇 고치기가 이렇게 어렵다.


다시 이야기로 넘어가서, 초등학교 때부터 그 미용실을 억지로 가면서 귀찮고, 답답했다. 하지만, 그 짜증 속에서도 갔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미용실 원장님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미용실 원장님은 미인이셨다. 정말 미인이셨다. 그래서 참 좋았다. 가는 것은 귀찮았지만 그 원장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예쁘신 얼굴이었고, 짜증을 냈던 내게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이야기 많이 해주시고, 늘 좋은 분위기로 나를 진정시켜 주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짜증은 사라졌던 것 같았다. 당시 그 원장님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머리카락을 자르면 늘, 시계를 봤다. 거울 뒤에 있던 시계. 그 시계를 보면서 나는 "몇 분만에 다 잘랐다."라고 말한 기억이 있다. 늘,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았다. 짜증 나고, 귀찮음이 있어서 빨리 미용실을 나가고 싶어 했다. 그러면, 원장님께서는 똑똑하다고 내게 칭찬을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원장님에게 칭찬 들으면 참 기분이 좋았다. 순수함이었을까? 아니면 원장님의 예쁘신 모습에 그랬을까? 


당시, 미용실 근처에는 아파트가 있었다. 그래서 미용실을 방문할 때, 손님이 많아 대기를 하면 거기에서 혼자 혹은 동생과 아파트 근처 놀이터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모래로 별별 행동을 했고,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는 등 기다림 속 지겨움을 그렇게 달랬다. 꽤, 놀다 보면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부르셨다. 이발할 시간이다. 아, 좀 더 놀고 싶었는데...... 아쉬움 속에 그렇게 모래알을 털고 동생과 함께 들어갔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샴푸로 머리를 감고 미용실을 나오면 그 답답한 머리들이 순간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름에는 뜨거움 속 풍성했던 머리에서의 열기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빨리 머리카락이 자라기를 바랐다. 그만큼, 내 머리카락은 계절에 민감했었다.


미용실에 가면, 단골 아주머니들 아니면 할머니들이 방문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분들의 근황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나를 정말 잘 대해주셨다. 당시, 내가 초등학생이었으니 어찌 보면 조카나 손자로 생각하며 봐주셨던 것 같았다. 그렇게 노는 듯 아닌 노는 듯하며 거기 잡지보고, 신문 보고 나서 머리카락 자르고 시계 몇 분 이야기하는 패턴이 쭉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머니의 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갔다. 중학교에 진학했으니 그러할 지도 모른다. 여전히 원장님은 세월이 흐르셨음에도 미인이셨다. 그리고 항상, 나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편안하게 대해주신 것은 분명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여전히 원장님은 모습이 변하지 않는 동안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 주변이 개발에 들어가면서 우리 가족은 내가 대학교 2학년 여름 때, 부득이하게 이사를 했다. 다시 말해, 그 미용실을 이제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참 아쉬웠다. 기억나지 않는 유년 시절부터 초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2학년 여름 전까지 거의 15년 가까이 그곳에서 머리카락을 잘랐다. 안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이사를 갔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이사 가기 전에 원장님에게 미리 이야기했다고 한다. 당시는 휴대폰이 있었기에 나중에 자주 연락하고 안부 묻는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그 미용실을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좀 더 시간이 흘러, 나는 내가 살던 동네를 방문했다. 우선, 내가 살던 집을 가봤다. 터만 덩그러니 남았고, 주변은 주차장이 되었다. 물론, 집 주변에 있던 다른 집들도 다 사라지고 휴식 공간과 공원이 되었다. 당시 이웃집들은 정다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움을 마음에 생각하며, 내가 다녔던 미용실로 가봤다. 미용실을 가려면 골목길을 내려가 슈퍼마켓을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 골목길도 사라지고, 주변 집도 다 바뀌었다. 그리고 슈퍼마켓도 모두 사라져 이제는 휴식 공간이 되었다. 세월이 참......


이윽고, 그 미용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원장님은 손님 때문에 바쁘셨다. 그래서 차마 들어가지는 못했고, 먼발치에서 원장님의 모습을 봤다. 여전히 얼굴은 미인이셨다. 변한 게 없으셨다. 그리고 당시에 세팅 상태와 의자 모두 그대로였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아파트의 놀이터는 사라졌다. 놀이공간이 또 사라지다니...... 그렇게 원장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집으로 갔다.


좀 더 시간이 흘러, 나는 어머니의 통화를 들었다. 미용실 원장님과의 이야기를 하신 듯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어머니께서는 오래간 만에 원장님과의 대화에 만족하신 듯했다. 내가 물어보니, 아프셨는데 다시 건강이 회복되어서 운영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당시 거주하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해서 새로운 곳에서 산다고 말씀하셨다. 아, 세월이 그만큼 흘렀구나. 또 새로운 변화가 있었구나. 그런데 어머니의 말씀, 여전히 얼굴은 그대로라고 한다. 다시 말해, 여전히 동안이고 미인이라는 것이다.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난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이제는 두 번 다시 갈 수 없지만 원장님이 운영하던 미용실에서 늘 귀찮았던 나를 진정시켰던 그 상황이 참 생생했다. 그리고, 생애 첫 파마를 했고, 염색을 했을 때, 너도 어른이라고 말했던 그 상황이 생생하다. 이제는 그 말을 머릿속에 생각만 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이사한 아파트에 산다. 그래서 나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 그분도 실력이 좋으시다. 그런데, 유년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이용한 미용실의 추억이 너무도 난다. 그립고, 참 좋았는데 밀이다. 단골 고객들과 이야기도 하고, 간식도 먹고, 찰나의 순간이지만 진짜 영화처럼 스쳐갔다.


여전히 그 미용실은 운영되고 있다. 간판에 네온사인이 켜지고, 미용실의 원장님은 여전히 드문드문 오는 고객에게 머리 손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동네 인구수가 줄고, 모든 것이 공원과 휴식공간 그리고 주차장으로 바뀌면서 언젠가는 그 미용실도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미용실에서의 추억은 살아있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원장님의 아름다운 모습까지도 말이다. 가을밤 무렵, 남겨보는 미용실의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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