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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Jan 10. 2024

결혼운만 믿고 소개팅에 나갔다

100

바깥기온 영하 5도, 하지만 내 마음은 100도.

평상시면 절대 외출하지 않을 뼈가 시린 날인데 잘생긴 소개팅남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부끄럽지만 새벽부터 눈이 번쩍 뜨였다. 속물처럼 들리겠지만, 잘생기면 그저 와따여. 


현재 직업 없고 당장은 약속된 빛날 미래도 없는 나를, 조건 보지 않고 일단 만나보겠다는 그 남자의 마음이 기특해서 만나기도 전에 이 남자는 나에게 벌써 플러스 점수를 받아냈다. 나의 별풍선을 받으시오. 그는 차 씨 성을 가진 2살 연하 직장남이라 했다. 잘생긴 것도 감사한데 나이까지 어리시다니. 취미가 불우이웃 돕기이신가 보다. 원래 미신을 믿는 타입은 아니지만 혹시나 싶어 소개팅에 앞서 네이버 무료 2024년 애정운을 찾아보니,


'조금만 노력을 하면 더 좋은 애정운 또는 결혼운을 이루게 됩니다. 모성애를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애정운이 더욱 상승하게 됩니다.'


비록 2살 차이지만 엄마 같은 여자가 되어야겠다.

차 씨,  나를 누나대신 어머니라고 부ㄹ..


'2024년에는 면사포를 뒤집어쓰겠어!'... 는 아니지만 결혼 생각이 없을 줄 알았던 K도 결혼식 날짜를 덜컥 잡아버렸고 '결혼은 다 부질없는 짓이야' 외치던 지인도 애인과 꽁냥꽁냥 잘 되어 가는 걸 보니 티는 안 냈지만 부아가 치밀어 오ㄹ... 꼴보기 싫ㅇ.ㅓ...


정말 나만 끝까지 솔로로 남지 않을까 싶은 불안한 마음에 똥줄이 서서히 타들어갔다. 민증번호가 1로 시작하는 남성분이라면 기회가 올 때마다 만나보기로 2024년 새 목표를 정했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몇 안 되는 소개팅 제안이지만 생명연장줄처럼 손에 꼬옥 쥐고 일단은 만나보자 싶은 마음에 J 남편에게 부탁해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소개팅 시간으로 언제나 그렇듯 어중간한 오후 3시로 정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할 거야'라고 말했던 어린 왕자처럼 나는 오후 3시에 그 남자를 만나기로 했지만 설레어서 새벽 1시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눈에 콩깍지가 될지 내 눈에 잿가루가 될지는 만나봐야 알 문제겠지만 사진으로 본 그의 이미지는 너무 좋았다. 


약속시간에 맞춰 여유롭게 집에서 출발했는데도 7분 정도 지각하고 말았다. 초행길이기도 했고 혹시 입냄새가 날까 봐 편의점에서 자일리톨껌을 사, 한꺼번에 5개를 씹어재끼는 바람에 턱이 3초가 돌아간걸 재정비한다고 조금 늦었다. 먼저와 앉아있으니 천천히 오라는 배려심 가득한 문자를 받았지만 그의 여유로운 마음과는 달리 내 마음을 조급했다. 헐레벌떡 커피숍에 들어가 자동차 와이퍼처럼 두리번두리번거렸지만 사진 속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이런 까인 건가.

저 멀리서 자일리톨을 기괴하게 씹으며 부랴부랴 뛰어오던 내 모습을 보고 토끼셨네.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친구 남편을 봐서라도 그러진 않았겠지 싶은 다급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쪽 노란 소파 테이블에 앉아조신하게 손을 흔들며 나를 쳐다보는 그가 보였다.


다행이다. 일단 안 가셨구나.

그것만으로 당신은 합격입니다.


남자를 향해 자일리톨 같은 하얗고 커다란 건치앞니를 들이밀며 수줍은 듯 그러나 당당하게 인사를 건네었는데 순간, 남자 얼굴이 내가 생각한 느낌이랑 조금 달라서 당황했다. 내가 본 사진과는 다르게 생겼다. 뭐랄까. 포토샵으로 사진을 보정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완전 다른 건 아니고. 또 그렇다고 같은 인물이라 하기에는 쪼금 애매한, 나훈아가 아닌 너훈아 같은 모창가수 느낌. 옛말에 비유하자면, 이 남자가 밤에 깎은 발톱을, 지나가는 쥐가 먹고 이 남자로 변신했다고 해야 하나 아님 잉크가 모자라 프린트가 덜 된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흠.


그리도 잘생겼다.

어서 나를 어머니라 부르시게.


나의 도착과 함께 남자가 미리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가 나왔고 (센스 있어!) 그가 들고 와 테이블에 살포시 올려뒀다. 긴장 탓에 윗니가 입술에 달라붙은 것 같아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냅다 들고 손목을 꺾으려는 순간,


"저기 잠깐."


... 차 씨가 외쳤다.

동작 그만. 

누나, 그거 다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 가 아니라 그거 그렇게 홀랑 마셔버리면 휴대폰 모서리로 정수리 찍어버립니다 김 씨.



선 고함 후 설명.

차 씨는 최근 취미 삼아 블로그시작했는데 스스로의 약속인 '1일 1 포스팅'을 해야 된다며 커피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뒤늦게 양해를 구했다. 눈치 없이 홀라당 마셔버렸으면 첫 시작부터 삐걱댈 뻔했다. 나의 허락이 털어짐과 동시에 경건하게 시작된 그의 전문 포토그래퍼 수준의 화려한 손목스냅 원투쓰리. 대충 한두 장 정도 찍고 끝낼 줄 알았는데, 소개팅이고 나발이고 모르겠고 맷돌 돌리듯 이 각도 저 각도 돌려가며 주변시선 아랑곳 하지 않고 속사포로 찍어댔다. 사진 찍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던지, 정치인 기자회견에서 어느 베테랑 기자도 저렇게 열정적으로는 못 찍을 것이다. 다각도의 커피&케이크 사진을 찍기 위해 남자가 척추를 반으로 한껏 접고 꽃게처럼 옆으로 왔다 가다리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 남자 엉덩이와 눈이 마주칠뻔했다. 초면에 엉덩이 어필은 너무 진도가 빠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눈을 위로 잠시 올리고 있었다.


자리 선정을 왜 여기로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카페 테이블 높이가 평균사이즈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얼른 마시고 빨리 집에나 가라는 카페주인의 굳은 의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세팅이었다. 어찌나 낮던지 케이크이라도 한입 하려고 하면 엉덩이가 의자에서 붕 떠졌다. 마치 케이크와 투명 시소를 타는 것처럼 내 엉덩이는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다. 


아 이렇게 불편하고 불쾌한 소개팅은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신선해.

마음에 들어.




초면에 엉덩이까지 들이밀며 사진을 찍은 게 민망했던지 그는 괜스레 블로그 이야기로 입을 뗐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블로그를 운영하기 때문에 뒤늦게 시작한 본인은 경쟁력 있는 콘셉트를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명한 카페나 뷰 맛집으로 알려진 곳이 가장 많이 검색되고, 그것을 중점으로 포스팅을 해야 조회수가 많아진다나 어쨌다나. 


순간 이 새끼가 지 블로그 포스팅 하려고 2살이나 늙고 무직인 나와 소개팅을 일부러 하려는 건가 싶은 합리적 의심이 들어 괘씸했지만 마카롱 같은 그의 달달한 얼굴을 보니 아마 겸사겸사 나온 게 아닐까 싶은 자기 위로를 하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카페 소개하는 거면 메뉴판이랑 화장실도 다 찍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라 농담을 던졌지만 이 남자는 이상하리만큼 당당한 표정으로

이미 진즉에 한 바퀴 훑었습니다.

광속보다 빠른 미래 파워블로거의 행동력.


아 제가 몰라 뵈었네요.

... 이것이 나 같은 평범한 시민들은 모르는 블로거들의 한 발 앞서는 행보인가.


30분 먼저 와서 둘러보고 사진도 다 찍었다고 다. 그는 신이 나서 앨범 어플을 켜더니 오른 손목에 박자감을 넣어 휙-휙 옆으로 빠르게 넘겨 보여줬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시작해, 간판샷 전체 테이블샷 창문샷 메뉴판샷 화장실샷 전체내부샷 외부샷 천장샷 바닥샷 의자샷 조명샷 계단샷. 언제 2층까지 갔다 왔는지 2층 테이블샷 2층 창문샷 2층 전체샷 2층 천장샷 2층 바닥샷 2층 의자샷 2층 조명샷  등등등. 변기샷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맛집 소개 블로그가 아니라 '먹거리 X파일' 같은 사회 고발 프로그램처럼 치밀하고 꼼꼼하게 카페 곳곳 찍어놨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 남자, 블로거가 아니라 디스패치 사진기사 수준이네. 이 남자 앞에서는 행동과 언행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익제보에 대한 사명감에 불타서, 자칫하면 나의 모난 행동 하나하나를 사건반장에 자세히 제보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은근히 눈빛이 돌았어.


블로그 얘기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좋아하는 음악, 영화, 여행, 음식, 반려동물까지 다양한 주제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지만, 나의 마음이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서로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맞장구 리액션을 했지만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서로 1분씩 발언권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대통령 후보 토론회 같았고 마치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나는 시계를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파워블로거가 되면 한턱 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 와의 만남을 정리했다. 그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외모는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이긴 하지만, 외모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제껏 잘생긴 남자가 최고라 생각했고, '얼굴값의 법칙'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의 외모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지만, 그와의 다음 만남에도 주고 받는 대화없이 그의 외모에만 집중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울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니, 외모, 재력, 직업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만나더라도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고 다음 해야 할 말을 생각해 놓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 이 남자와의 소개팅을 통해, 오랫동안 고집해 오던 내 이상형에 대한 기준이 바뀌었다.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다.









+


행운의 색이 검정이길래 올블랙으로 입고 갔더니

초상집룩이 되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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