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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Feb 13. 2024

마법사 간달프도 흰머리를 보고 슬펐을까

105 별거 아닌 일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흰머리가 있다.

충격이었다.


머리숱이 일반인보다 2배 정도 많아 미용사들이 대놓고 눈치를 줄정도로 빽빽한 머리숱인데 그 좁디좁은 두피를 비집어 뚫고 흰머리 한올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내 눈에 눈곱이 껴서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인게 아닌가 싶어 세수를 연신 해댔다 흰머리를 애써 부정하면서.


지만 이럴 수가. 정말 안테나 마냥 정수리 옆에 흰머리 한 마리가 솟아있었다. 마치 흰머리 한올이 '축하합니다 당신도 이제 노화입니다'라 알려주는 것 같았다. 흰머리는 노화의 상징 이랬는데, 맨날 말버릇처럼 '늙어 죽겠네 늙어 죽겠네' 거렸더니 정말 신체가 나의 늙음을 알아차리고 흰 깃발을 내 보냈나 보다. 사실무근이지만 세포가 죽은 자리에 흰머리가 난다는 친구의 말에, 얼마 전 책상 모서리에 정수리를 찍은 것이 화근이 되었나 싶기도 하다. 


나도 늙어가는구나 평생 이십 대 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꺼이꺼이. 가만히 흰머리를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내가 초등학생 1학년, 엄마는 30대 후반이었던 시절. 엄마는 용돈 벌이라는 미명 아래 나에게 흰머리 뽑기를 제안했다. 흰머리 한 개당 10원이라는 현상금까지 걸린 터라, 눈이 번쩍번쩍 빛나며 나는 엄마의 머리통에 달려 붙어 비트코인 채굴하듯 열심히 흰머리를 찾았다. 엄마의 풍성한 검은 머리숲 속에서는 아쉽게도 흰머리카락이 몇 가닥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용돈을 안 주려는 수작인가 싶은 의심이 살짝 들긴 했지만 난 원숭이 이 잡듯 신중하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몇 되지 않는 엄마의 흰머리를 쏙쏙 골라내어 백 원을 벌었다. 10시간 같던 1시간의 노동 끝에 겨우 번 돈으로 쌍쌍바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노동은 힘들었으나 그 대가는 참으로 달콤했다. 어린 나이에 알아버린 자급자족의 맛, 달다 달아.

10개를 뽑아야 사 먹을 수 있는 그 시절의 쌍쌍바.

흰머리 한 개당 10원이면 엄마를 노동청에 고발했어ㅇㅑ해ㅆ..


처음에는 흰머리만 골라 또-옥 뽑는 게 재미났는데 점점 하다 보니 눈이 침침해지고 손가락 끝도 아파왔다. 돈은 벌어야겠고, 하나하나 뽑는 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순간 아인슈타인 같은 번뜩이는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유레카! 어쨌든 뽑기만 하면 되잖아!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1타 1000피, 머리끄댕이 권법.

한 움큼에 최소 흰머리 10개는 있을 테니 100원 준비하시죠 어머니.

독한 효심. 뽑아라고만 했지 어떻게 뽑으라고는 안 했다. 될 성 푸른 불효는 떡잎부터.


그로부터도 (..... 다시는 안 그런다고 약속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최저임금도 되지 않는 중노동을 했다. 찾아보니 당시, 1995년 최저임급은 1170원이었는데 고로 나는 엄마 흰머117개를 뽑아야 본전인셈이다. 이런이런. 그때 엄마를 노동청에 고발했어야 해ㅆ..


몇 해가 흘러 드문드문 보였던 엄마의 흰머리카락들은 마치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똥별처럼, 까맣던 엄마의 머리를 은빛 별빛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지니 엄마는 더 이상 흰머리를 뽑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엄마는 따끔따끔한 고통보다는 한 큐에 흰머리를 새까맣게 만들 수 있는 염색을 하기 시작했고 나의 쏠쏠했던 용돈벌이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린 나는 내돈내산으로 산 달콤했던 쌍쌍바의 맛을 잊지 못해 화장실 한편에 올려둔 엄마의 염색약을 몰래 훔쳐 나와 공원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동네에 저렴한 미용실이 개원했고 엄마는 정기적으로 미용실에 가 염색을 했다. 엄마의 머리가 검게 물들수록 어린 내 가슴도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로소 나의 용돈 벌이는 대단원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 머리에도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의 흰머리를 뽑아내며 느꼈던 손끝의 따끔거림과 쌍쌍바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을 떠올리니 내가 어느덧 그때의 엄마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을까? 아님 오빠와 나 때문에 엄마로서의 삶으로만 살아야 했을까? 엄마의 희끗희끗한 흰머리는 엄마의 묻혀버린 꿈과 희망의 흔적이지 않았을까.


고작 흰머리 한올에 소설을 쓰고 앉았네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눈으로 나이 듦을 본 건 처음이라 생각이 깊어진다. 거울 속 낯선 나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니, 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은근하게 반짝이는 흰머리가 돋보인다. 마치 밤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처럼, 이것은 나의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지 않을까. 어른으로써의 나를 더 아껴주라는 신호. 때마침 음력으로 새로운 한해가 시작됐으니 다시 마음잡고 더 분주하게 살아야겠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백발이 되어있을 나의 모습이 너무 기대된다.

얼마나 재미있게 살아왔고 전할 이야기가 많을까.

라이프 이즈 굿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물론 콧수염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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