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맥을 잘 본다는 용한 한의원에서 들은 말이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생리통이 더 심해졌다. 진통제를 사탕처럼 하루종일 입에 물고 지냈다. 잦은 진통제 복용은 몸에 안 좋다는 걸 알지만 배를 난도질당하는 고통을 참아낼 수가 없어 한 달에 5일은 진통제에 의지해 겨우 견뎠다. 병원에 가서 검사도 해보고 약도 먹어봤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고통은 두 배로 찾아왔다. 그러다 엄마는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겠다며 주변에 물어물어 산 넘고 마을 넘어 진맥을 귀신같이 집어준다는 허준을 찾아갔다.
나의 체형사진을 모니터에 띄워두고는 한의사가 말했다.
"어깨 양쪽이 바르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자궁이 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생리통이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엄마는 내가 불치병 진단을 받은 거 마냥 벌벌벌 떨면서 그럼 어떡하면 좋냐고 침을 주든, 한약 주든 해결방안을 달라고 간절히 물었다. 그랬더니 어깨의 발란스를 바로 잡으려면 수영만큼 좋은 운동이 없다며 수영을 권유했다. 차마 혼자 수영장에 다닐 자신이 없어 집에서 놀고 있던 친구 한 명을 겨우 꼬셔서 같이 수영장을 알아보러 다녔다. 최종 선택을 한 수영장은 레일이 여덟 개나 있는 꽤 큰 규모의 회원제 스포츠센터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는 온탕과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작은 풀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일주일 뒤 시작하는 새벽반으로 등록하고 우리는 그날 바로 수영복을 사러 갔다.
중학교 이후로 수영복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수영복을 입는다는 생각만 해도 부끄러웠다. 게다가 당시에는 과체중이었기 때문에 쫙 달라붙는 수영복을 입고 미천한 몸뚱이를 흔들거리며 수영장을 활보한다는 생각만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 수치스러웠다. 최대한 덜 뚱뚱해 보이는 검은색에, 날씬해 보이는 빗살토기무늬가 곳곳에 들어간 디자인이 제일 무난해 보여 그걸로 결정했다. 하지만 사이즈가 너무 애매했다. 나의 체형은, 상체는 개발도상국이고 하체는 선진국인 서로 다른 분단 국가의 조합으로 위아래 균형이 맞지 않아 수영복을 찾기가 어려웠다. 상체에 맞춰 M 사이즈를 입자니 엉덩이가 괴롭고, 엉덩이에 맞춰 XL 사이즈를 입자니 상체가 너무 빈곤했다. 직원분도 난감해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눈에 보여 더 민망했다. 친구는 그럼 가슴과 엉덩이, 양쪽이 둘 다 공평하게 불편할 수 있도록 L사이즈를 사라는 솔로몬 같은 답을 내어주었다. 유레카!
수영장 입성 첫날, 거울에 비친 수영복 입은 내 모습이 생각보다 덜 흉측스러웠다 사실 디자인 빨 인지는 모르겠지만 날씬해 보이는 내 모습에 취해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았다. 역시 검은색은 진리라며 혼자 만족하고 있는데 수모를 쓰고 나온 친구의 모습을 보니 친구지만 참 못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저 년도 머리빨이었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도 뒤늦게 수모를 써봤는데.
이런이런.
나도 머리빨이었다.
수영 겁나 잘하게 생겼잖아. 내가 강사인줄 알면 어쩌지.
거기에다가 눈알만 겨우 가릴 수 있는 크기의 수경을 쓰니 무장공비가 따로 없었다. 한마디로 못생긴 애 옆에 있는 더 못생긴 애가 되었다. 대머리가 되면 큰일 날 얼굴이라는 생각에 앞으로 모발을 더 소중히 아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선글라스가 참 잘 어울리는 스타일인데, 수경은 선글라스랑 달랐다. 같은 검은색 계열의 안경이라, 수모를 쓴 흉측스러운 내 얼굴을 수경이 조금은 커버해 줄 거라 기대했는데 그냥 그저 못생김이 두 배가 될 뿐이었다. 수영장을 등록하기전, 물과 한바탕 놀 준비가 된 물고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풀세팅을 하고 보니 어느 물고기도 나처럼 흉측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친구와 서로의 수모를 쓴 엄지발가락 같은 얼굴을 보며 깔깔거리다가 뒤늦게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강사님과 다른 회원님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준비운동을 한 뒤 첫 날인 나와 친구는 기초를 다져야 한다며 발차기 연습을 먼저 시키셨다.
수영장 바닥에 배를 대고 상체를 밖으로 내놓은 채 발차기를 하라는 강사님의 말에 당황했다. 엉덩이 쪽 수영복이 작아서 걱정이었는데, 물속이 아닌 바닥에서 발차기를 하라고 하니 정말 난감했다. 친구와 나란히 엎드려 강사님이 시키는 대로 발차기가 아닌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나의 예상대로 수영복이 점점 엉덩이 쪽으로 말려 올라갔고 하체 쪽 수영복 부분이 V모양이 T모양으로 바뀔 것 같은 불안감에 발차기를 소극적으로 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수영복은 쫀쫀했고, 엉덩이 면적의 80%가 보이기 전에 강사님이 쉬는 시간을 알려 주셔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휴. 풍기문란죄를 저지를 뻔했어.
10분간 자유의 몸이 된 우리는 엉덩이도 담기지 않는 유아용 풀장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며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을 꿈꿨다. 이 정도 물높이라면 헤엄쳐서 일본도 건너가겠다며 우리들만의 리그에서 행복해했다. 개헤엄을 치며 신나게 놀다가 강사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다시 끌려가 어김없이 물밖에서 열심히 발차기를 연습했다. 이렇게 물속에도 안 넣어줄 거면 수영복을 괜히 입고 왔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강사님이 내 생각을 읽었는지 이번에는 물안에 들어와 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수영장 벽을 잡고 물속으로 연속적으로 대가리 박고 음파음파를 시키셨다.
'음'할 때 숨 참고 물속으로 고개 넣고, '파'할 때 숨을 뱉어내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야 하는데, 음치 박치인 내 친구는 순간 박자가 꼬였는지,
음으ㅁ 꼬르ㅡ르르ㅡㄺ읅
파ㅏㅏㅏ아아아어ㅏㄱ악
음으ㅁ 읅으으ㅡ읅
파ㅏㅏㅏ학
셀프 물고문이 따로 없네.
저 정도 물고문이면 없던 잘못도 일러바치겠다.
음파음파의 속도감을 전혀 이해 못 하는 친구를 보니, 앞으로 저 년이랑은 워터파크에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말많은 친구를 보며, 저 년은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둥둥 뜨겠다 싶었는데 오늘보니 그것도 아니였다. 그렇게 나와 친구는 30분을 계속 숨쉬기 연습만 했다. 전반전에는 엉덩이 공개 개망신을 시키더니 후반전은 셀프 물고문을 시키시는구나 싶은 마음에 과연 이러한 행동들이 나의 생리통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강사님이 나를 보며 허벅지가 국가선수급이라며 태생적으로 허벅지 근육이 우량하게 발달된것 같다며 끊임없이 허벅지 예찬을 이어가셨다. 강사님의 끝도 없는 허벅지 칭찬이 아슬아슬하게 성희롱의 경계선을 넘을랑 말랑할때 첫날의 수업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것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수영장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수영복을 입고 왔다 갔다는 건 확실한데, 정작 수영은 어떻게 하는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