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진주에서 유등축제가 시작되어 오랜만에 친구들의 가족과 만났다. JJ 부부와 그들의 딸, K와 C 부부, 그리고 나, 이렇게 나만 솔로지만 워낙 가족 같은 사이여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불꽃놀이를 기다리며 정처 없이 걸어 다녔지만, 엄청난 인파에 휩쓸려 정신이 없었다. 아이가 있어 위험하기도 해서 근처에 있는 남자 J가 운영하는 헬스장에 잠시 쉬러 갔다. 남자 J와 나는 15년을 알고 지낸 사이지만 서로 낯을 가리다 보니 딱히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J 부부와 대학교 시절부터 쭉 친하게 지내오지만 남자 J는 여전히 말수가 적어서 대화를 시도해도 늘 벽에 대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너무 과묵한 갱상도 남자다.
불꽃놀이 시작 20분전, 심심해서 인바디 검사를 해봤는데 결과지를 보니 J에게 자세히 설명을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 J가 워낙 조용한 타입이라 제대로 알려줄까 의문스러웠지만 웬일. 혀에 모터를 단 듯 침까지 튀겨가며 설명 따발총을 연발했다. 마치 오랫동안 꾹꾹 참아왔던 헬스 트레이너의 영혼이 폭발한 듯했다. 참혹한 나의 숫자들 앞에서 한숨을 있는 대로 들이쉬고 내쉬고 하더니, 나보고 이렇게 살다가는 조만간 우리 모임에 오지 못할 거라며 살을 빼라고 했다. 그는 내가 곧 비만으로 인한 각종 성인병으로 운명할 것처럼 진지한 표정이었다. 헬스 트레이너 출신 사장님 답게 근육량, 체지방량, BMI 등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전문 용어를 쏟아내며 나를 향해 설교를 시작했지만,
난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모임의 저녁메뉴는 뭡니까.
남자 J의 날 째려보는 눈빛이 불꽃놀이보다 더 뜨거워서 내 살들이 다 타들어갈 것 같았다. 빨간펜으로 내 몸무게를 콕콕 찍어가며 격앙된 어조로 15.9kg를 빼야 그나마 평균치라며 나를 다그쳤다. 원래 저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물 만난 물고기 마냥 떨어대는 혓바닥이 어찌나 얄밉던지.
상담실 밖에서 기다리던 K가 궁금해서 나에게 결과를 물었다. 난 몸무게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라 K를 향해 고개를 돌려 당당하게 외쳤다.
"야, 나 10kg 이상 빼야 된데."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남자 J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정정했다.
"십오쩜 구키로."
칼같이 정확한 놈. 아...ㄹ 알았다고. 제대로 말할게.
"나보고 15kg 빼야 된다고 하네."
그러자 또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십오쩜 구키로."
앵무새인줄.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치밀한 새ㄲ... 자신의 몸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건강관리하기가 쉽다나 어쨌다나. 알겠어 알겠다고. 다시 제대로 말할게. 나는 K에게 소리쳤다.
십오쩜 구키로! 십오쩜 구키로!!!!!!!!
씹오쩌어어어엄 구키로ㅗㅗㅗㅗㅗㅗㅗㅗ
됐냐.
이제 만족하냐.
남자 J는 나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열심히 운동하고 제대로 식단 조절하면 금방 건강해질 것이라며, 당당하고 아름다워 싶지 않냐는 헬스장 회원 등록을 꼬실 때 사용하는 식상한 멘트를 날렸다. 헬스 트레이너가 봤을때 도전하고 싶은 몸뚱아리인가 보다. 운동 싫어. 풀떼기 먹기 싫어. 닭찌찌 먹기 싫어. 나는 이왕 돼지로 사는 김에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한 돼지로 살고 싶다고 말했더니 남자 J표정이 짜게 식어버렸다. 그리고는 10분 전처럼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저녁으로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뜨거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에서 퍼져 나오는 고소한 기름 향기는 코끝을 간지럽혔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표면을 가르자, 투명한 육즙이 흘러나와 입안 가득 퍼지는 상상이 절로 되었다. 육즙이 팡팡 터지는 삼겹살 한 점을 상추에 고스란히 올려 따끈한 흰쌀밥 한 숟갈 넣고 매콤한 고추 넣고 쌈장 넣고 입안 가득 오물오물 씹을 생각을 하니 입안에서 축제가 열릴 것 같았다. 나의 완벽한 쌈주머니를 왼쪽 편에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남자 J는 여름날의 귀찮은 모기처럼앵앵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삼겹살 330칼로리'
'된장찌개 210칼로리'
'공깃밥 310 칼로리'
'콜라 한 캔 150칼로리'
'회원님, 지방 한 덩어리 입에 들어갑니다'
그걸 먹으려고?
마치 다이어트 전도사처럼 나에게 칼로리 종교를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충격 요법을 통해 밥맛이 뚝 떨어져 살을 빼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나도 내 몸이 지금 많이 망가진 거 아는데, 퇴사 후 급격하게 살이 쪄서 다이어트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거 아는데, 나도 이렇게 계속 고칼로리만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다 아는데...
아아아ㅏㅏㅏㅏㅏㅏㅏ앙
마시쪄. 잘 봐, 이것이 실시간 먹방이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든다고 했어. 오늘 폭주하게 건들지 마. 난 스트레스받으면 폭식하는 경향이 있다구.
그날 혼자 삼겹살 3인분, 된장찌개, 공깃밥, 콜라 2캔을 해치웠다. 남자 J의 한심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삼겹살이 너무 고소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체지방률이 40.7%인 내가 기름진 음식을 맘껏 먹는 모습을 보며 한심함에 복장 터진 남자 J와는 달리, 나는 그날 입맛이 터져 야식으로 1000칼로리를 더 흡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