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계획에 없던 등산을 하게 됐다. 고향 마을 인근 면에 속한 산인데 전망대에서 보는 뷰가 좋다 하여, 친정 언니들의 부추김에 못 이기는 척 오르게 된 것이다. 연초록 자연의 빛깔을 좋아하는 나로서야 마다할 리 없는 계절이건만, 등산화는 커녕 편한 운동화조차 챙겨 오지 못했던 터라(하룻밤 잠시 다니러 온 친정 나들이였기에) 약간의 두려움과 망설임이 앞섰다.
차로 약 10분 정도 이동해 면사무소 앞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시멘트 깔린 마을길을 걸어 올라갔다. 50대 언니 두 명과 초등 고학년인 딸아이가 앞장서 걷고, 나와 갓 스물을 넘긴 남자 조카가 뒤에서 걸었다. 차 한 대 겨우 다닐만한 좁은 산길이지만 포장이 돼 있으니 그런대로 걸을만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걸으니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 왔어”
큰 언니의 말이 반갑게 느껴졌다.
“벌써 다 왔어?”
“어, 여기부터 시작이야. 이제 산길”
등산은 시작도 안 했다는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거 같았다.
이럴 거면 여기까지는 차로 왔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무서운 언니들… 사전 정보란 없다.
눈앞에 펼쳐진 계단부터가 심상치 않다. 계단이 필요할 거 같아서 만든 거 같기는 한데, 오르기 편하라고 만든 계단은 아닌 거 같다. 서울 인근의 유명 산들의 등산코스를 상상하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등산로가 있지만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산을 등산화도 없이, 심지어 굽이 있는 운동화를 신고 오를 생각을 했다니, 이건 너무 무모한 일이 아닌가. 어쩌면.. 평소 저질 체력으로 골골하는 동생을 골탕 먹이려고 부러 끌고 간 건 아닐까?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거친 호흡을 고르며 산을 올랐다. 산속 경치를 감상할 여유란 없었다. 어느 정도 가야 목적지가 나오는지를 알 수 없고 산의 생김새가 예측이 안되니 등산보다는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런 신발을 신고 등산이라니, 그것도 시골의 이런 야산을’
어린 시절 나는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봄의 산에는 진달래, 조팝나무 등 야생화들이 가득했고, 이 꽃들을 한 아름 꺾어오면 가슴 한가득 봄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혼잎(화살나무 새순), 취나물 등 내가 좋아하는 산나물도 가득한 산이니 산은 뭐든 거저 주는 곳이구나 싶었다.
기억 속 고향의 산은 이러했는데, 여기는 등산로를 조성해 놓은 곳이라 그런지 나물이 될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4월도 한참 지났으니 그렇겠구나 싶으면서도, 뭐 하나라도 건져가겠다는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헉헉 거리며 경사길을 오르고, 조금 완만한 길에 이르면 이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산이 숨겨 놓은 보물을 찾느라 일행의 걸음을 수시로 늦추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며 오르니 금세, 생각보다는 빨리, 전망대에 도착했다. 물론 쉬흔이 넘은 두 명의 여인과 초등학생 아이는 진작에 도착해, 헥헥거리며 올라오는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산의 선물은 이거였구나!
멋진 전망, 반도 모양으로 산을 둘러싸고 굽이져 흐르는 강이 마치 우리나라 지도를 연상케 했다. 좌우가 바뀐 모양이지만 유명한 다른 지역의 한반도 지형과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어 보였다. 등산로 초입부터 걸으면 30분 정도면 충분한 거리니 강제로라도 끌고 와서 보여줄 만하지 싶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정자에 앉아 좀 쉬어보려고 하자, 다시 출발하자고 한다.
”벌써 내려 가?“
”아니, 지금 온만큼 더 올라가야 정상이야. 정상까지 가야지“
이렇게 해서는 운동이 안 된다며 걸음을 재촉하는 50대들, 그리고 뭣도 모르고 호기심으로 따라붙은 10대, 그 뒤로 골골 거리는 40대와 20대가 어정어정 경사진 길을 걷는다.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지고, 자칫 잘못하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좁고 가파른 산길, 힘들고 두렵지만 우리의 목표는, 아니 저들 50대의 목적지는 정상이기에, 생각 없이 걷는다. 생각하면 포기하고 싶고 되돌아가고 싶은 길이다.
스무 살 조카는 신발이 미끄러워서 더는 안 되겠다며 중도에 멈추어 기다리기로 한다. 나는? 신발이 너무 불편해 발목과 허벅지가 욱신거리지만 통증에 익숙해지기를 선택한다. 전망대까지 온만큼 간다고 했으니 오히려 아까보다는 심리적으로 덜 부담되고 시간도 금세 가는 느낌이다.
마침내 ‘등주봉’ 정상에 올랐다.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석 하나가 전부인 한평 남짓한 소박한 산 정상. 뷰를 기대했다면 오르지 않는 것이 현명했겠지만, 언니들은 정상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 땀으로 범벅이 됐으니 충분히 운동이 된 거 같다며 만족감을 표하고 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이들에게 이 산이 준 선물은 ‘땀’이었다. 웬만한 강도의 운동으로는 좀처럼 땀이 나지 않는다는 둘째 언니는 오랜만의 땀을 본 게 무척 반가운 모양이었다.
길이 가파른 만큼 하산길이 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우려를 표하기도 전에 그들 세 명은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눈앞에서 사라져 저 멀리서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내려가다 미끄러지면 크게 다칠 텐데,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거 같은 두려움이 더 크게 밀려왔다. 난 고소공포증도 있는데…
내려가는 길은 오르던 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덜 들었지만 한발 한발 내딛으며 해묵은 공포와 씨름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너무도 빠른 속도로 그 공포가 끝이 난다는 것.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으니 청명한 새소리도 들리고 초록 나무의 싱그러운 내음도 느껴졌다. 아까는 못 봤던 보라색 들꽃도 눈에 띄었다.
이걸로 충분했다. 이거면 족했다. 내가 산에서 얻고 누리고 싶은 것들.
나의 언니들은 다음에는 다른 산의 정상에 도전하자고 한다. 이 산보다 조금 더 높고 가파른 산에.
정상에 이르는 길은 고되지만, 그곳에 다다랐을 때 느낄 수 있는 강한 성취감이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혹시 이날의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타의에 의해, 정상이니까 무조건 올라가야지, 남들이 괜히 오르겠어, 이런 마음으로, 준비 없이 오르는 이들은 어찌 되는 걸까. 그것이 인생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