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 하셨습니다

200m 시험을 마치고 이대준비반 선생님이 대기하고 계신 곳으로 위풍당당 걸어갔다. 짜릿하고 신기했다. 반복점프 시험을 반타작 해놓고 분명 멘탈이 온전하지 못했었는데. 내가 아는 나라면 200m 시험 역시 말아먹었어야 했다. 오히려 될대로 되라라는 마음에 숨겨진 힘이 솟았던 것일까. 31초 7이라는 기록은 연습 중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때에도 나온 적 없는 최고 기록이다.



선생님은 정말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선생님 역시 반복점프 시험이 망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으셨던 모양이다. 그 해 이화여대 입시 시험 시스템이 크게 바뀌었으니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작년 무릎 수술을 했을 때의 '무조건적인 낙관'이 다시 한 번 발현이 되었던 것일까. 왠지 모르게 기대를 해보고 싶어졌다. '혹시 모르잖아?'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어느새 나는 이화여대 과잠바를 입고 2호선을 타는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기적은 무릎 수술까지였다.



4종목 중 하나를 과락 수준으로 받았다면 역시 합격까지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예비 번호에도 들지 못했는지 조회 페이지에 '불합격 하셨습니다'라는 문구만 담담히 올라와 있었다.



20살 성인이 되자마자 본 첫 시험. 200m 시험 때의 뜨거웠던 박동과 반복점프 시험 때의 서늘했던 기분이 뒤섞이며 떠올랐다. 목 아래에서 더운 감정이 솟았다.





가, 나, 다군 각각 1개 대학을 선택하여 총 3개 대학에 정시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이화여대는 가군이었다. 불합격 했으니 이제는 나, 다군에 주력할 순서였다. 무조건적인 낙관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 후 나군 동국대, 다군 경희대 시험을 준비했다.



나군 동국대학교 체육교육과. 시험 자체는 한 종목이었지만 마치 근대5종 종목과 같이 몇 가지 요소가 섞인 셔틀런이었다. 약 100m 거리의 코스 안에 사이드스텝, 윗몸일으키기, 점프스텝, 중량들고 전력질주 등을 최종 몇 초 안에 완주하는지를 측정하는 것이다. 최종 기록도 중요하지만 각 요소를 정확한 자세로 했는지도 평가 대상이었다. 즉, 최종 기록만 의식해서 요소들을 대충대충 빠르게 해버리는 것도, 요소들을 잘 해내느라 시간을 너무 잡아먹어서도 안되는 시험이었다.



다군 경희대학교 스포츠의학과는 나머지 두 학교에 비해서 입시 시험이 매우 쉬웠다. 체대이긴 하지만 실기 능력보다는 수능 성적을 더 비중있게 보는 시스템이었다. 유연성, 단거리 달리기, 셔틀런 등을 평가했는데,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라면 99% 정도는 합격할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였다.







불합격.

불합격 하셨습니다.



나머지 두 학교도 시원하게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동국대는 전체 입시생들 중 중간 정도의 기록을 받았었다. 경희대는 수능 성적부터 이미 합격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집중력과 절실함은 이화여대 시험에서 모두 산화했는지 큰 기대가 없었다. 덕분이라고 해야할까. 큰 실망도 없이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화여대 마지막 200m 선을 통과하자마자 시험관의 입에서 '31초 7'이라는 숫자가 나왔던 순간의 짜릿함. 그것만을 강렬하게 남긴 채, 나는 첫 입시에서 시원하게 실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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