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원동력으로 굴러가는 곳
제가 어렸을 때에는, 자식들한테 네가 특별하다고 가르치는 부모는 한 명도 없었어요. 그때는 엄한 부모가 좋은 부모라고들 생각했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부모님한테 회초리나 몽둥이로 다리가 부르트도록 맞는 것도 흔한 일이었고요. 그러다가 다음 세대가 되어서야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고, 특별하다고 가르치는 교육법이 유행하기 시작한 거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또 한 세대가 지나니까 ‘너희는 특별하지 않다’ 는 말이 환영을 받네요. 아이들의 본성은 그대로일텐데, 양육법만 돌고 돌아요.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부모님이 그들에게 했던 방식과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자기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 나를 잘못 대했어, 그래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됐어.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장강명 <재수사>
내가 자식교육에 있어 가진 철학과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책은, 교육관련 서적이 아니라 놀랍게도 살인자를 찾는 범죄 추리소설 <재수사> 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부모님이 나를 잘못 키워서 지금 내가 이모양 이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다. 원하는 내용과 지식을 부러 찾아 탐독하는 독서도 좋지만, 내가 독서에 매료되는 순간은,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읽은 책에서 뜻밖의 생각을 만나게 될 때다. 나와 비슷한 작가의 생각을 만나면 책은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거기에 답해가며 반짝이는 깨달음을 얻게될 때, 그 깨달음은 내 안에 들어와 나의 한조각이 되어 쌓인다. 책값만을 내고 이렇게나 값진 배움을 얻어가도 되는 것일까. 아무 생각없이 연 행운상자에서 최고로 좋은 패를 뽑았을 때처럼 나는 책과 작가에게 우연히 빚을 지게 된다. 그 우연들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내 인생의 여러 부분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고 믿는다. 내 아빠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그래서 아이들에게 독서의 재미와 매길 수 없는 값어치에 대해, 읽고 깨닫고 마음안에 쌓아가는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서만큼은 늘 가르쳐주고 싶다. 그러나 독서는 교육이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가진 철학이 없다. 관심없음, 철학없음이 내가 아이들의 교육에 관여하는 ‘교육방식’ 이었다. 원초적으로 표현해보자면 될 놈은 되고 할 놈은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달까.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기원에 대해 좇아보면 말해 뭐할까, 거기엔 부모님이 계신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사셨고, 누구보다 우리 남매의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다. 진학할 고등학교와 대학, 전공과 직업까지 정해두셨었더랬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기주도적으로 무언갈 고민하거나, 결정해본 경험이 딱히 없었고, 진짜 공부를 해야할 시기에 오히려 고삐를 놨다. 당연히 원하는 대학엔 진학하지 못했고, 그러고도 정신을 못차린 나머지 남들은 10대에서 늦어도 20대 초반까지 대부분은 끝냈어야 할 진로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20대 후반에서야 했다. 지금이나 20대 후반이 어리지, 나때만 해도 결정된 진로에서 열심히 일하고 결혼을 준비해도 했을 나이였다. 그리고 부모님의 영향아래에서 비로서 벗어나 내가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하고 판단해야 했을 때에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반대로 남편은, 혼자서 무엇이든 결정해야 했다. 두 돌이 채 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읜 남편은 엄마 품도 함께 잃었다. 네 명의 자식을 건사해야 했던 어머님은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살림은 늘 빠듯했고, 엄마의 손길은 남편에게 까지 미치지 못했다. 학원은 먼나라 얘기였고, 어머님의 잔소리가 그렇게 들어보고 싶었다던 그는 거진 혼자 커서 국내에서 손꼽는다는 대학엘 갔고, 3년 이상을 투자해야 합격할 수 있다는 국가공인자격시험에 대학교 졸업 전에 합격해 전문직으로 사회에 나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남편은 결국, 공부로 밥그릇을 찾았다. 내가 “당신이 우리엄마 아들이었더라면, 그렇게 공부잘하는 아이를 갖고 싶어했던 우리엄마, 잔소리가 고팠던 당신 둘다 윈윈이었을텐데.” 라며 우스갯소리를 종종 한다. 남편은 부모님이 본인을 든든하게 서포트 해주셨더라면, 경제적, 심리적으로 부모님의 지지를 더 받았더라면 자신이 더 잘되었을거라 이야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이미 내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남편은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교육과 경제적 지원을 아이들에게는 해주고 싶어했지만, 아이들 교육과 관련한 사항은 거의 내가 관장하고 있는지라, 나는 딱히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학원과 문제풀이에 이력이 난 아이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양을 학습한 아이가 훨씬 영민하고 빠르게 흡수할 거라 믿었다. 마치 남편이 어린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건 우리가 강남으로 이사온 데에 아이들 교육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전 동네도 교육에 딱히 부족함이 있던 곳은 아니어서 그저 다른 아이들이 하는만큼, 대형 영어학원과 학습지, 미술과 태권도 이정도로 아이의 하루는 꾸려졌었다. 그것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였고, 그 전까지는 미술과 태권도만 배우고 종일을 놀았다. 다만, 독서만은 꾸준히 시키려고 어린시절부터 많은 양의 책을 늘 자기 전에 읽어주었었고, 나도 늘 근처에 책을 두고 읽었었기 때문에 환경이 나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강남으로 이사를 와서도 작은 수학학원과 태권도 학원만 보내고 다른 사교육을 딱히 하지 않았다. 동네 분위기에 역행하는 교육이랄까. 아이는 학교수업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고, 학교생활에도 무난하고 무탈하게 적응했다. 더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준에 맞는 책들은 글밥이 점점 많아져서 마침내 도저히 읽어줄 수가 없었을 때까지 책을 꾸준히 읽어주고 쥐어주었다.
“일반 대치동아이들에 비해 많이 늦어요.”
대치동 학원가에 상담을 받으러 몇 군데를 갔을 때 매번 내가 들은 이야기였다. 이제 6학년, 앞에서 얘기한 적절한 양의 학습을 소화해 낼 적절한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한 나는 학원을 알아보고 등록을 하려는데 산넘어 산이고 심지어 갈수록 태산이었다. 돈을 내고 학원엘 등록한다, 그 간단한 게, 여기서는,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었다. 교습방식이 마음에 드는 몇몇 수학 학원을 알아봤는데, 그 학원에 다니려면 레벨테스트를 봐야 했다. 레벨테스트에는 아이가 한 번도 배우지 않은 각종 경시대회용 심화문제와 앞선 학년의 문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레벨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개인 교습소에서 그 학원 레벨테스트 맞춤 강의를 들으며 따로 준비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는 학원엘 다닐 수 없다는 의미였다. 기가 찼다. 학원엘 다니기 위해서 학원엘 다녀야 하다니. 그러나 과목을 불문하고 대치동 학원가의 생리가 그러했다.
몇몇 학원에서 상담을 마치고나면 한결같이 내 아이를 내가 의심하게 됐다. 예상했던 결과를 받아보면 더 그랬다. 예상했지만 확인사살을 받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일반 대치동 아이들에 비히 많이 늦었다니, 아이를 두고 하는 ‘늦었다’는 표현을 두돌이 다 되도록 걸음마를 떼지 못한 아이나, 다섯살이 넘어가도록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 쓰는 걸 들은 이후로 처음 여기에서 들었다. 그들이 권하는 수준의 레벨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서 부모에게 자신의 아이를 늦은 아이라고 생각하도록, 그곳은 만들었다. 엄마의 불안한 마음을 자극해 지갑을 끊임없이 열게 만들어서 유지되고 굴러가는 곳, 우리나라의 사교육을 주도하고 떠받치는 거대한 시장은 불안을 원동력으로 힘차게 굴러가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