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와 이별하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공포영화가 의도한 바를 배반하면서 다 커버렸다. 40대를 목전에 둔 아직은 삼십대였던 어떤 날 나는 예전에 진저리를 치느라, 놓친 장면이 본 장면보다 더 많았던 공포영화를 다시 보며 내가 깜짝 놀라기는 했으되,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영화가 실패한 영화여서가 아니라, 내가 무서워하지 않았다. 끔찍한 서사와 무서운 화면으로부터 시작해 내 존재를 압도해오는 본연적인 공포를 극복하고, 그 압도감에서 한발짝 벗어나서 공포의 실체를 해석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서서히 어른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느낀 공포는 엄마가 읽어주던 <여우누이>였다. 무자비하게 시작돼 디스토피아적으로 마무리되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이야기에 매료된 건 사실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도 글자는 큰 힘이 없었다. 책이 끝나면 나의 두려움도 끝났다. 이야기가 비로소 영상으로 재연되었을 때 나는 본격적으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최초로 본 공포물은 물론 국민공포물의 시초 <전설의 고향>이었지만, 그 땐 무서운 화면들이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고, 그보다 좀 더 큰 국민학생이 되어 <똘똘이 소강시> <홍콩할매귀신>과 같은 조악한 수준의 cg와 분장을 보고는 무서움을 느꼈다. 시야가 방해를 받는 밤이라는 시간과 정체모를 소리들, 낭자하는 피, 그 사이를 오가는 귀신들을 보면서 본능적으로 저들이 나를 해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다. 그러나 ‘공포’ 와 ‘두려움’ 이 더 진화해서 내 옆에 실재할 수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오멘> 이라는 영화였다. 초등학교 5학년즈음의 어느 겨울밤이었다. 티비에서 주말 밤에 하는 토요명화에서 방영하던 오멘을 보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화장실을 참다가 같이 보던 아빠에게 화장실을 가자고 청했고 소변을 보면서 아빠를 화장실 문앞에 세워 두었다. 놀랍게도 그 때 우리집은 거실 바로 옆에 화장실이 붙은 아파트였다. 하지만 오멘의 주인공도 엄마 아빠와 바로 옆에 꼭 붙어 있었어도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 그정도면 쥐도 새도 모를 일이었다.
친구들과 극장에서 최초로 본 공포영화는 <여고괴담> 이었다. 여고괴담은 그 때 한국의 공포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수작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며 최초로 개봉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시리즈물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였다. 당연히 그 영화는 14살이던 나도 사로잡았다. 이 때부터 나는 공포영화에 빠져들며 유명하달 수 있는 수많은 공포영화들을 꿸 듯이 다 보았는데, 그 후로 또 한 번 만난 최고의 공포영화는 <링> 이었다. 일본문화가 전면 개방되고 얼마지 않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링을 학교에서 보고는 몇날 며칠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찍힌 사진에서 내 얼굴이 흔들려서 인화되었을까봐, 밤에 전원이 꺼진 티비에서 머리를 신발한 귀신이 소복을 입은 채 기어나올까봐 한동안은 늘상 주위를 경계했고 그 때의 오싹하고 서늘한 느낌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걸 잊을 무렵인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알포인트> 나 <주온> 을 명작으로 기억한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내 공포의 대상은 귀신과 저주였고, 쫓기고 달아나고 짓눌리고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일련의 행위들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의 남편과 처음 봤던 공포영화는 <불신지옥> 이었는데, 그 때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나는 둘다 극장에서 좌석 중간에 팔걸이가 있음에도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부둥켜안고 영화를 봤다. 그 전에 보았던 영화들은 전래동화 속에 나오는 귀신이나, 이질적인 장소의 유령 같은 것들이라 대학생이 되면서 가까스로 나는 그 두려움들을 극복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 나오는 공포영화물들은 네가 사는 곳에 안심할 만한 장소와 시간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 일상을 잠식해오는 공포에 초점이 맞춰졌다. 복도식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와 창문, 그리고 내 방의 침대밑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정체모를 누군가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는 두려움, 내 방의 창문 틈으로 누군가 나를 훤한 대낮부터 감시한다는 공포, 그러다가 낯선 존재와 동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짓눌러 왔고, 백주대낮에 창문의 커튼을 한껏 닫아놓고 불은 환하게 켜놓는 것이 과연 맞는 행동인가, 라는 딜레마에 자주 빠지곤 했다. 현실에 발을 디뎠다고 믿었던 아가씨가 되어서까지 인적이 드문 곳을 무서워 했던 이유도 시꺼먼 옷을 입은 모르는 행인과의 동행보다 귀신의 등장쪽에 있었다.
그런 공포심들이 전적으로 엄마 아빠의 덕분이고 우리동네의 은혜로움이었단 걸 깨달았을 때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을 알고나서였다. 내가 이사갈 집의 대출이 안 나온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부모님이 보이스피싱에 당할 뻔 했을 때, 아빠가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에서 운좋게 병원진료를 보게 됐을 때, 첫째 혼자 탄 버스가 종점까지 갔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말만 남기고 연락이 끊어졌을 때, 어린이날 행사를 하던 큰 공원에서 둘째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두려움에 떨다가 거의 혼절할 뻔 했다. 실은 귀신은 내 일상과 생활의 안녕에 어떠한 힘도 행사할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내 일상이 위협받으면서 절감했다. 일상이 위협을 받는 것, 내 하루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 그게 귀신보다 더 무서운거였다. 그런 일들을 하나 둘 겪어가며 나는 더 이상 공포영화가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가 내가 어른이 된 때인 것으로 나는 정의했다.
여전히 나는 공포물 애호가다. 중학생이 된 딸과 나는 사탄의 인형이며 여고괴담부터 나 어릴 때는 존재를 몰라 무서운 줄도 몰랐던 좀비나 괴수가 나오는 부산행이나 괴물까지 함께 본다. 주말밤, 마치 영화관에 온 듯 불을 다 꺼놓고 팝콘과 함께 얇은 담요를 사이좋게 무릎에 덮은 채 나란히 앉아 손을 부둥켜 잡고 집중해서 본다. 마치 처음 보는 공포물인듯. 예전에 내가 느꼈던 순수하고 충만한 공포, 공포 그 자체를 아이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게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라는 마음일 리 없다. 화면 속에만 존재하는 공포, 아무런 힘도 없는 악귀와 괴물, 귀신과 좀비의 향연에도 파르르 몸을 떨고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는 아이의 무서움을 지켜주고 싶다. 그건, 아직 따뜻한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세상살이의 냉정함과 잔혹한 사회의 질서를 모른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하루를 살아내더라도 일상의 평온과 안녕을 위협하는 공포는 차고 넘치도록 많고, 일상이 평화롭다면,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면 그건 절로 그러한 게 아니라 엄마와 아빠가 안간힘을 쓰며 지켜내주고 있는 거란 사실을 늦게 깨달았으면 싶은 마음이다.
영화가 끝나고 화면에서 빠져나오면 깜깜하게 불꺼진 우리집 거실의 정갈함이, 내 방에 가지런히 그대로 놓인 침구와 이부자리가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 하찮은 것들이야말로 나를 이루고 지탱해주는 질료라는 것을 무섭고 으시시한 이야기들 속에서 빠져나온 뒤, 나는 한 번 더 자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