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는 결혼하고나서 무려 19번의 이사를 했다. 내가 채 태어나기 전 많은 집들이 엄마와 아빠를 스쳐갔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우리집은 5층짜리 주공아파트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내가 태어나고 나서도 월세였던 단칸방을 여러 개 거쳤다. 나는 지금까지 남은 여러 사진들과 엄마 아빠의 증언들로 이전의 집들을 상상하고, 내 허벅지에 영원히 남겨질 화상의 상처로 내 몸은 그 집들을 기억한다. 부엌과 방의 구분이 없던 단칸방에 우리가 살던 시절, 나는 뽈뽈 기어다니다가 갓 끓여낸 미역국을 냄비째로 엎었다고 한다. 그 때에 데인 내 다리는 아직도 엄마의 가슴과 내 몸에 지워지지 않는 흉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내 몸이 그걸 말해줄 뿐 그 때의 기억은 없고, 아파트로부터 내 인생은 시작되었다. 엄마가 이사를 다닌 최초의 이유는 하나였다. 부엌과 방이 구별되어 내가 안전하게 '기어다닐' 수 있는 곳.
아빠는 그 아파트에서 왕복 4시간이 걸리는 도시로 출퇴근을 하셨다. 엄마는 새벽마다 일어나서 아빠의 도시락을 싸셨고, 아빠는 따뜻한 도시락이 다 식어가는 사이 고속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셨다가 빈 도시락을 들고 사위가 어두워지는 무렵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빠가 새벽녘의 안개를 뚫고 출근을 하고 하루가 밝아 오면 엄마는 일과를 시작했다. 그 일과란 것은, 나와 동생에게도 아침을 챙겨 먹이고 동네의 아줌마들과 부업을 시작하는 거였다. 삼삼오오 모여 엄마는 하나에 1원짜리 봉투에 풀을 붙이거나, 조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이음매가 울퉁불퉁한 오리의 등을 매끈하게 깎아내었다. 그 일에 오전 내내 열중하자면 웅숭그리고 앉은 온 몸이 엄마의 표현대로 ‘안 아픈 곳이 없을 지경’ 이었지만 엄마는 몇 번의 스트레칭과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으로 뻐근함을 단숨에 떨쳐내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그룹 과외를 했고, 가구 공장에서 물건을 떼와 중개해주는 부업도 했다. 그야말로 쉴 틈없는 하루였다. 그런 하루살이의 고됨을 알 턱이 없는 나와 동생은 엄마 아빠를 우주삼아 그 집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엄마와 아빠도 커가는 나와 동생의 몸피처럼 자연스럽게 불어나는 통장의 잔고를 보며 피로한 줄도 아픈 줄도 몰랐다. 아끼고 쪼개야 하는 팍팍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그 때는 옆을 봐도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다 비슷하게 살고 있었고,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좁지만 두다리뻗고 잘 수 있는 수도권 외곽의 작은 집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다.
비슷한 시기, 엄마의 사촌동생 이모는 결혼을 하면서 이모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중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꿈꾸고 선망하는 노른자위라는 동네였다. 이모는 동네가 낯설고 외로워서 엄마에게 가끔 연락을 해왔고 가능성의 땅으로 이사를 오라고 독려(?)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은 기회의 땅이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좇아 이동하고 있었고, 그 동네가 돈이 된다는 걸 알았겠지만 엄마와 아빠는 거기로 가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우리집은 그 동네, G시였기 때문이고 거기서 꾸리고 누리는 생활은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 없이 알맞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끼니가 해결되는 시장이 있었고, 때되면 유명외화가 걸리던 작은 극장이 있었다. 아직 도시로 환골탈태를 하기 전이던 G시에는 봄에 개구리알을 채집하고 가을이면 밤을 딸 산도 있었고, 겨울이면 너른 스케이트장으로 변하는 논도 있었다. 나와 동생이 다니던 국민학교가 있었으며, 갈 예정이던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때는 산책이라는 단어가 생활이 되기도 전이고, 환경에 대한 인식도 부족해 하천은 아직 정비되지 않아 각종 쓰레기와 연탄재들이 넘쳐났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와 걷는 초여름의 하천변은 더할 나위가 없는 산책길이 되어 주었다. 이미 부산땅을 한 번 떠나온 엄마 아빠는 낯선 곳에서 기회를 찾는 것보다 원래 있던 곳에 더 단단히 뿌리내리기를 선택했다.
아빠는 성실한 사람이고 엄마는 수완이 좋은 사람이어서 부모님은 월급을 쪼개고 나누고 모으는 한편, 부업으로 생긴 수입을 보태어 이사를 했다. 노동으로 번 돈을 모아서 집을 샀다. 그렇게 이사를 감행할 수 있었던 건, 미래에 대한 전망과 노동에 대한 가치를 낙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하면 삶은 나아지는 것이었고 열심히 살면 미래는 밝은 것이었다. 긍정적인 분석이 부모님의 하루를 한눈 팔 새 없이 정신똑바로 차리고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내 우주가 집이였듯, 엄마와 아빠의 우주는 그 때 당시 G시여서 스무번에 가까운 이사를 하는 내내 우리가족은 G시 사람이었다.
내 얘기뿐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집, 우리를 먹이고 입히며 재우던 동네에 관한 기억은 다들 비슷한 모양일 것이다. 내 한 시절이 있어서 따뜻하고, 그 곳에서 자라 어른이 된 나를 품어주는 유년의 기억이 있는 곳. 옛날 어르신들이 ‘고향’ 하면 떠오르는 마음이 그러하듯, 우리 가족에게는 집이 그렇다. 내 부모가 선택하고 기거한 곳, 내가 태어난 곳, 나를 가족으로 맞이한 엄마아빠가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 곳, 나 역시 그러한 이유로 그 동네 사람인 곳. 떠나는 사람을 보내고 들어오는 사람을 맞이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난다는 이유들로 내가 떠나지는 않을 곳. 내가 생각하는 집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G시에서 보낸 나는, 40대가 되어 남편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이 곳으로 이사를 왔다. 오래 전 엄마의 사촌동생 이모가 사셨던 그 곳이다. 부동산과 재테크, 경제와 돈에 밝은 남편이 선택한 이 동네에 우리는 딱히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위기에 이끌려 왔다. 동네의 분위기가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현재 사회의 분위기 말이다. 신축, 역세권, 대단지, 거기에 서울이나 서울 근접 수도권. 전국민이 똘똘한 한 채라는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각개약진하는 작금의 대한민국, 우리는 지금 모두 ‘같은 집’을 원하고 있다. 집은 주식처럼 정찰제가 아니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이므로 모두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집은 당연히 몸값이 치솟는다. 인기있는 곳에 돈이 몰리는 것을 탓할 순 없으나 모든 조건과 생활, 가치와 이유를 집에 저당잡히는 건 문제다.
가만히 있으면 꼬리칸으로 떠밀려버리고 자고 일어나면 경매시장의 농축산물 가격처럼 억단위의 집값이 오르내리는 상황이니 이런 말이 유행한다. 벼락거지, 몸테크, 영끌과 같은 얘기들이 모두 집을 사고 파는 시장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다보니 요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삶의 질이 높아지고, 예전보다 많은 집이 견고하고 화려하게 지어지고 있지만 그 홍수속에서도 다들 같은 집을 원하면 선택지는 몇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신문에서 이런 말도 보았다. 강남3구와 마용성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말일테고 하수구, 탄광촌이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신문은 전했다. 모두가 열망하는 서울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정부에서 규제를 시작하면 그 풍선효과로 집값이 덩달아 오르는 수도권의 지역을 일컫는 말이라는 신조어를 봐도 알 수 있듯, 전 국민의 시선이 수도권 몇몇 도시로 쏠리고 있나보다. 내가 살던 터전과 가족과 일군 생활과 보금자리를 미련없이 털고, 과거의 추억과 낭만에 젖을 새 없이 모두들 같은 집을 원하고, 보고, 사고(buy), 산다(live). 이런 상황에서 땀흘려 일하는 노동은 가차없이 팽개쳐지고 하찮은 것이 된다. 모두가 원하는 집 한 채를 갖지 못하면 뒤처져 버리고, 그것이 곧 내 가치를 하락시켜 미래를 비관하게 되는 삶, 오늘날을 사는 많은 사람들의 비슷한 모습이다.
어딜가든 사람사는 건 거기서 거기고, 가족이 있는 곳이 내가 사는 곳이다. 그곳에도 분명 새로운 이야기와 생활이 움틀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만이 절대적인 삶과 인생의 잣대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사는 동네가 직주근접의 편의때문일 수도 있고, 또 그저 원래 편하게 살아오던대로 살아가는 관성일 수 있다. 한편, 자연경관이 좋아서 집을 고르기도 하고, 층간소음과 빛공해가 없는 동네를 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인데 그 자체로 모두 중요한 가치이자 세계관이다. 떠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예전 동네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한 우리 엄마 아빠처럼 누구에게나 우선인 제각각의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똘똘한 한 채에 미쳐 같은 곳을 바라보는 오늘을 그려낸 뉴스와 신문기사를 보며 나는 또 어리석게도 G시를 생각한다. 이 동네로 이사를 와서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기억하는 것과 잊은 것을 떠올릴 때면 그 끝엔 어김없이 G시가 있다. 돈계산에 뒤처지는 촌스럽고 낡은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엄마와 아빠가 있고, 그게 세상의 전부이던 나와 동생이 자라나던 그 곳이 머릿속에 아련하고 따뜻하게 걸어오는 말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