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 멀찍이서 걸어오는 할아버지 한 분을 보았다. 구부정한 어깨에 왜소한 체격, 좁고 조심스러운 보폭과 걸음걸이, 새하얗게 샌 머리카락의 할아버지는 그럼에도 체면과 예의를 중시하는 분이었다. 내가 그렇게 단정짓는 건, 그 분이 체크무늬 헌팅캡과 잿빛 콤비 재킷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리 차려 입은 할아버지들을 볼 때면 불문율처럼 멋쟁이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건 나뿐은 아닐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멋쟁이 할아버지는 점차적으로 가까이 다가왔는데 나는 왈칵 눈물이 날 뻔 했다. 노인이 되고 나서 우리 엄마가 아빠를 꾸며주는(?) 방식도 그러했던 터라 할아버지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아빠가 떠올랐나 보았다.
부모님의 집에 놀러 갈 때면 늘 거실 쇼파의 1인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뉴스나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 식탁의 중앙에 자리하는 사람, 항상 엄마가 밥을 1등으로 퍼주는 사람, 책상에 꼿꼿하게 앉아 독서하는 뒷모습을 내게 보여주는 사람. 언제고 내 옆에 있어왔던 사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앞으로도 그럴 사람. 아빠와 나는 ‘우리’ 였다. 아빠는 내게 그렇게 2인칭으로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나는 3인칭 시점에서 노인이 된 아빠를 ‘아마도’ ‘처음으로’ 본 거지 싶다. 작고 왜소해서, 불면 날아갈 것 같고 쥐면 꺼질 수도 있겠다 싶은 노인. 그 노인은 위태롭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 걸음걸이로 천천히 천천히 나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이름도, 주소도, 얼굴도 모르는 그 할아버지가 안쓰럽고, 슬프고, 서글펐다.
그렇지만 얼마전 나는 아빠에게 화를 내었다. 그 할아버지를 길에서 마주하기 며칠 전이었다. 요즈음 부모님 댁엘 가면 내가 하는 일은 엄마 아빠의 부탁을 받는 것인데, 그 부탁이라는 게 별 게 아니라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신청’ 이나 ‘접수’ 에 관한 것들이었다. 각종 공과금을 납부하고, 만기된 정기예금을 재예치하거나, 정부나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각종 혜택과 지원금을 신청하는 일들을 나는 재빨리 해치우고 엄마 아빠와 커피를 마시거나 티비를 보며 한담을 나누었다. 엄마 아빠는 유치원 접수부터, 입학, 내 이름앞으로 개설된 통장이며 중고등학교의 수업료와 학원비 납부같은 일들을 모두 ‘직접’ 종이위에 기입하고 발로 뛰어서 마치셨을 것이며 그렇게 나를 키웠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모든 절차는 수기에서 컴퓨터로, 컴퓨터에서 또 한 번 핸드폰으로 옮겨지며 간소화되었지만 엄마 아빠에게 그건 간소하지 않았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는 내가 해드릴 차례다.
내가 화를 낸 건, 그런 것들 때문이 아녔다. 그런 건 조금도 귀찮고 번거롭지 않았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하루종일 핸드폰을 끼고 사는 내가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될 일을 하고도 칭찬과 사과를 동시에 받으며 생색을 낼 수 있는데 싫을 리가. 내가 아빠한테 소리를 친 건, 핸드폰을 가지러 방에 가기 위해 일어나는 아빠의 어깨가, 몸을 일으키는 아빠의 엉덩이가 영락없는 할아버지의 폼이라서였다.
“아빠! 엉덩이 집어넣고 어깨 펴! 할아버지같잖아!”
나는 고민없이 망설임없이 소리쳤다. 아빠는 나를 바라보고 엉덩이를 바짝 치켜세우고 어깨를 곧추 세우며 이정도면 되겠냐고 되물으셨다. 그정도면 되었다는 내 말에 아빠는 조금은 어색하고 낯선 모양새로 방으로 들어가셔서 핸드폰을 가지고 나오시는데 이내 자세는 내가 지적했던 그 때로 돌아가 구부정해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 거냐고,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 우습게 본다고 자세 꼿꼿이 하고 위풍당당하게 걸으시라고 훈수를 두었다. 어떤 말 한마디에도 따뜻하고 애살있는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난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다. 벌써 중학생이 된 손녀와 초등학생인 소녀를 두고, 정년 퇴임을 한 지는 15년이 되어가는 1949년생. 만으로만 따져도 일흔 여섯인 우리아빠는 할아버지가 맞다. 사실 내 마음은 길에서 모르는 할아버지를 보고 느꼈던 연민과 같은 것이었을 거라고, 모르는 할아버지와 맞닥뜨리고 나서야 알았다. 언제나 가장 뒤늦게 따라오는 감정이 후회이듯, 그제서야 아빠에게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따라왔다. 아빠가 노인이 되는 게 싫다. 언제나 내 옆에서 깎아지른 듯한 준엄한 산맥으로 남아 주셨으면 싶다. 그래서 내가 울고 싶거나 힘들 때, 방향을 잃었을 때, 선택을 앞두고 머뭇거릴 때,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바람을 막아주는 높은 산이었으면 좋겠다. 그 모든 마음은 한낱 내 이기심과 생떼에 불과하다는 걸 아빠를 대신해 핸드폰으로 이것 저것을 대신 해드리는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니라 지적을, 애살있는 제스처가 아니라 비난을 했다. 모르는 할아버지를 보고 울컥 터지던 눈물 대신 평생을 옆에 계셨던 아빠에게는 핏대세운 목소리로 “늙지마!” 라고 되지도 않을 소리를 했다.
비난은 가깝고 연민은 먼 법이다. 가족에게 특히 그렇다. 왜 나는 딸의 친구들에게서는 철이 없어 귀엽고, 뭘 몰라서 천진한 소녀를 보면서 내 딸에게서는 어른을 보고 싶어하는가, 남편의 친구들에게는 너그럽고 사려깊던 나는 남편에게는 엄격하고 냉정한가, 회사에서는 세상 수다스럽고 잘웃으면서 우리집 거울 앞에는 입이 댓발이나 나온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나밖에 없는가. 모르는 노인에게는 연민을 품으면서 부모님 앞에서는 노여움을 드러내는 나를 보면서 내가 편안하다는 것과 쉽다는 걸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소중한 존재들이 주는 그 편안함은, 편안함 때문에 종종 쉽다는 착각을 준다.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은 사람들로 오인한다. 2인칭으로 묶여있는 우리는 늘 같이 있기 때문에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그렇게 될 때,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구부정하게 일어서던 아빠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말 한마디였을 것이다. 아빠의 늙음은 피할 수 없는 거지만,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더 그랬어야 했다. 작지만 다부지고 옹골찬 체격의 사나이였던 우리 아빠가 이제 그 할아버지처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야 할 때, 그 옆에는 내가 있어주겠다고, 넓고 꽉 찼던 아빠의 어깨가 점점 굽어가고 눈이 어두워져갈 때 내가 대신 보아드릴 수 있다는 얘기가 험준한 산맥에서 야트막한 동산이 되어가는 아빠가 진짜 듣고 싶은 얘기였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종종 아빠를 밖에서 바라보는 다른 할아버지들처럼 바라볼까 한다. 때로는 ‘우리’ 사이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언제일지는 모르나 반드시 끝이 날 아빠와 내 사이에 일어날 후회들을 조금은 줄여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다. 한편으로는 밖에서 우리 아빠를 보는 모르는 다른 젊은이들이 내가 며칠 전 어떤 할아버지에게 그랬듯 '멋쟁이 할아버지' 일 우리 아빠에게 연민과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섞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