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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조각글 Feb 24. 2023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_생애 첫 기억

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한동안 ‘생애 첫 기억’을 글쓰기 주제로 삼은 적이 있다. 신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생애 첫 기억이 뭔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요, 가족과 함께 즐거운 나들이를 갔다거나 작은 성취를 이루고 크게 칭찬을 받았다거나 길을 잃어버려 울다가 결국 엄마를 찾았다거나 하는 소소한 사건들이 나머지 대부분이다.


나의 생애 첫 기억은 이런 것이다.


어린 나는 친할머니 집에 맡겨져 있다. 충남 논산 깡시골의 흔한 농가 툇마루에 앉아서 큰아버지가 소를 몰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걸 본다. 큰아버지는 너무 무섭고 종종 나를 다그치거나 때렸기에 나는 조금 긴장한다. 소를 우리에 넣으려는데 갑자기 이놈의 소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기 시작한다. 큰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윽박지르던 성질머리 그대로 소의 고삐를 붙잡고 욕지거리를 한다. 소는 고갯짓을 크게 한 번 하더니 더욱 버티며 마당으로 뒷걸음질 친다. 월남전 참전 용사인 큰아버지가 근육을 불끈이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소용없다. 보나 마나 뻔하다. 일하는 내내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성난 황소에게 복수를 당하는 것일 게다. 큰아버지는 툇마루에서 지켜보고 있는 저 어린 꼬맹이 때문에라도 굽힐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리며 황소에 맞선다.


잔뜩 뿔난 황소가 온 마당을 날뛴다. 큰아버지는 고삐에 이어진 줄을 꽉 붙잡고 버티다가, 결국 처참하게 밟히고 만다. 원심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황소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고삐줄을 잡은 큰아버지로 마당에 큰 원을 그린다.


이 장면은 슬로비디오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박혀있다. 모든 게 무섭고 겁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어쩌지 못하고 툇마루에서 지켜보다가 얼른 할머니를 찾아 달렸다. “할머니, 큰아버지가… 소, 소가… 큰아버지를…”


할머니는 정지 뒤쪽에서 무슨 일인가를 보고 있다가 다급한 손녀의 목소리에 놀라 마당으로 뛰어 나간다. 할머니는 금세 소를 진정시켜 우리에 넣고, 방에 들어가 커다란 담요를 들고 나와 아들의 몸을 덮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러 나섰다. 마당 한가운데서 담요에 덮인 월남전 용사가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나는 똑같이 덜덜 떨며 보고 있다. 나의 원수, 월남용사에게 황소가 통쾌한 복수를 해 준 순간이 아닌가.


그날 큰아버지는 다리가 부러졌다. 아마 구급차가 왔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큰아버지는 한쪽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해서 한동안 방 안에서 꼼짝 못 했다. 손에 집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고 어린 조카를 때리며 이년 저년 욕하던 큰아버지. 그 후로 큰아버지가 “이년 이리 와! 이 나쁜 년!” 하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는 나를 잡겠다고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다가오려 애쓰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꼬맹이인 내 심부름이 아니면 물조차도 떠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불쌍한가.


스무 살도 한참 넘은 어느 날 엄마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했는데, 엄마는 그때 내가 겨우 두 돌이 지났을 뿐이었다며 어떻게 그걸 기억하느냐고 놀랐다. 그래서 이것이 내 최초의 기억인 것을 알았다. 20년 만에 자기 딸이 아동학대를 당했단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시아주버니를 떠올리며 새삼 치를 떨었다.


가만있어 보자… 그때가 두 돌이 지났을 때라고…? 내 생각에 그 때 난 적어도 여섯 살은 되었어야 맞다. 그렇게 어릴 때라는 걸 믿기 어려웠다. 기억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게나 어린아이에게 폭력적인 어른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모든 장면을 아주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내가 국민학교 입학할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 시골집은 영영 사라졌는데도, 그 집의 대문, 소 우리와 마당, 툇마루와 정지, 큰아버지에게 맞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던 내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내가 엄마의 곁을 떠나 할머니 집에서 큰아버지의 손아귀에 놓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동생이 태어나자 버거웠던 엄마는 나를 할머니 집에 맡겼다. 한동안 외할머니 집에서 지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외할머니와 친할머니가 논산의 시내에서 만나 나를 인수인계했다. 외할머니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큰 시내로 나갔던 날도 기억한다. 교차로에 큰 약국이 있고, 약국 벤치는 나그네들의 쉼터였다. 외할머니가 사 주는 요구르트를 마시며 친할머니를 기다렸다. 참, 호칭이 이상하기도 하지. 외할머니야말로 나에게 가깝고 친한 할머니고, 친할머니는 무섭고 정 없는 바깥 할머니였는데 말이다. 하여간 두 사돈은 나를 두고 잠깐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친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외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 잘 가라.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아, 나는 그냥 외갓집에 있어야 했다. 딸기밭으로 둘러 싸여 맑은 시냇물 가에 놓인 정겨운 집에.


친할머니는 나를 보살폈지만 외할머니만큼 다정하지는 않았다. 울 엄마가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내리 둘을 낳은 걸로 타박을 했으니 나를 예뻐했을 리가 없다. 그 집에서 나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월남전 용사에게 때때로 학대를 당했다. 베트콩 때려잡던 솜씨로 세 살 배기인 나를 두들겨 패려고 다가오던 그 굵은 손과 무섭게 노려보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나에겐 생애 첫 기억이라는 게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엄마아빠와 놀이동산에 간 걸, 최초로 뭔가를 이루고 칭찬받은 걸, 명절에 떠들썩하게 모인 친척들 사이에서 장기자랑한 걸 첫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나는 학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좀 운이 나빴던 걸까? 아니면, 황소가 복수해 준 기억이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엄마가 동생을 낳지 않았다면, 엄마가 나를 시골집에 보내지 않았다면, 내가 엄마아빠의 보호와 보살핌 아래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면, 천덕꾸러기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어릴 때는 이런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결국 자라는 동안에 동생에 대한 감정이 뒤틀렸고, 어른들의 눈에 들기 위한 노력은 처절했고,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애정결핍으로 목말랐다.


성난 황소에 밟혀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불쌍해해야 할지, 내가 당한 것들을 생각하며 복수심에 불타 고소해해야 할지,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지, 인과응보라고 여겨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태로 모든 시간을 오롯이 혼자 보냈다. 목사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엄마는 ‘아멘’이라고 했다. 복잡한 마음을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고 부모는 내 감정을 적절히 다루는 방법을 일러주지 못했다. 엄마는 나중에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렀다며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과했다. 어른이 된 나는 엄마의 사과를 받았지만, 내 인생을 생각하며 애틋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10대의 방황과 20대의 타락이 뭘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수치심으로 가득 차 벽장 속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두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른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스스로를 조금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유년 시절을 떠올리고 모든 사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본다. 별 일 아니라고 치부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어린 나에게 크고 작은 상처로 박혔던 것이구나 생각한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아픈 기억 한두 개쯤 가지고 있는 거겠지…라고 애늙은이였던 20대의 나는 마음의 상처를 외면하면서 자해를 해댔던 것이다. 유년의 나도, 청소년의 나도, 청년의 나도 모두 참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 모두를 껴안아 주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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