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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조각글 Jan 21. 2023

시루떡과 딸기잼, 내 사랑의 원천

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할머니는 해방 이후 혼란통에 경찰이었던 첫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태백산맥을 읽은 나는 할머니의 전남편이 친일파여서 공산주의자의 손에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할머니는 평생 '빨갱이'를 저주하셨으니까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의 고향은 전라도 고창이나 정읍쯤이다. 할머니는 과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논산에 사는 할아버지와 재혼했다. 할머니의 나이는 그때 겨우 스무 살 무렵이었고, 아이도 없는 몸이었지만 재혼 상대였던 할아버지는 딸을 셋이나 둔 홀아비였다.


(이 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 엄마의 부모를 칭한다. 나는 엄마의 부모에게 '바깥 외'를 쓰고 아빠의 부모에게 '가까울 친'을 쓰는 것이 못마땅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한 후 4녀 4남을 낳았고, 남편이 데리고 온 큰 딸 셋까지 합쳐 무려 열한 명의 아이를 키워냈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낳은 네 번째 자식이며 두 번째 딸이다. 할아버지는 논산의 한 마을에서 국민학교 교장을 했고, 엄마와 형제들은 사택에서 살면서 이웃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았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니 엄마도 풍족하게 자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이웃들에 비하면 그래도 형편이 나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엄하게 표준어 교육을 시켜서 엄마는 깡시골에서도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고 자랐다. 엄마는 바로 옆 동네의 무지렁이 농부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던 아빠와 결혼했는데 처음에 '시집가서' 시댁 식구들이 쓰는 충청도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이질감을 느꼈을 정도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고 해서 기억에 없지만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졸업할 때 총장에게 상을 받는 모습도 보고, 결혼하는 모습도 보고 돌아가셨다.

  
성차별이 심한 집안에서 자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자란 환경을 생각하면 조금 신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할머니는 둘째 딸의 맏딸인 나를 끔찍이 아끼셨고 나는 어릴 때부터 그걸 느꼈다. 예를 들어 할머니는 나를 '떡보'라고 불렀는데, 내가 떡을 잘 먹어서 그랬다. 사실 워낙 없이 살다 보니 뭐든 먹을 게 생기면 맛있게 잘 먹었던 것일 텐데 할머니는 내가 떡을 유난히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느 해인가 내 생일날에 할머니가 직접 쌀을 들고나가 팥시루떡을 한 말이나 해 주시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를 열며 "우리 떡보 많이 먹어라." 하셨다. 아니, 아무 날도 아닌 때에도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면 할머니는 나를 위해 쌀 한 말씩을 들여 떡을 하곤 하셨다. 나는 지금도 인절미나 절편, 가래떡처럼 찰진 떡보다 팥고물이 잔뜩 들어간 시루떡처럼 멥쌀로 지은 설기떡을 좋아한다. 삼베천을 열면 뜨거운 김이 훅 끼쳐오는 갓 지은 떡을 시루째 선물 받아 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니까.


할머니가 나만 사랑했느냐 하면 그건 아닐 거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열다섯 명이나 넘는 장성한 사촌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모든 손주들이 할머니의 사랑을 특별하게 경험했고 할머니가 자기를 유난히 아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었을까? 모든 손주들의 취향과 입맛과 성적과 특기를 알고 명절마다 선물을 챙기시고 다녀가실 때마다 좋아할 음식을 챙겨주셨다. 중요한 건 할머니가 딸과 아들을, 손녀와 손자를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전처의 자식을 뺀다 해도 할머니에겐 여덟 명의 자식이 있고 그 자식들이 각각 2~3명의 아이들을 낳았으니 내가 할머니의 사랑을 특별히 독차지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사촌들의 경쟁을 뚫고 할머니를 몇 번이고 독점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 기억들이 너무 특별해서 생각할 때마다 행복해진다. 나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사촌들 중에 누구도 떡을 시루째 받아본 사람은 없을 것이니까.


엄마는 스무 살에 나를 낳았는데 남편이 대책 없이 무능했다. 젊은 나이에 허리 수술을 해서 힘든 일을 도무지 해내질 못 했고, 그런다고 배운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굶어 죽기 딱 좋았다. 일복이 터진 엄마는 아이 둘을 다 데리고 있을 만큼 한가하질 못했다. 나는 어릴 때 여러 번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동생은 너무 어려서 떼어놓질 못하고 조금 큰 나라도 할머니에게 맡겨뒀던 것이다.

할머니 집이 있는 곳은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로 예전에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바짝 붙어 있는 시골집이었다. 자갈이 깔린 시냇물은 너무 맑아서 맨 눈으로도 물고기 떼를 볼 수 있고, 바위를 들면 새우와 가재가 나왔다. 사람들이 자갈밭에 돗자리를 깔고 피라미를 잡아 찌개나 라면을 끓여 먹곤 했다. 집에 방이 여러 개 있어서 나는 여러 방을 돌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고, 벽장이나 다락에 올라가기도 하고 할머니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종알거렸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5촌이나 6촌쯤 되는 언니들이 있어서 언니들에게 제법 귀여움 받았다. 언니들이 말끝마다 '거시기혀서 거시기했당게~'라고 하는 게 재미있어서 거시기를 도대체 몇 번이나 하나 손가락으로 세면서 이야기를 듣다가 꿀밤을 맞은 기억도 난다. 언니들과 어디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저 산 위에 변태가 있다고 해서 보니 어떤 미친놈이 산꼭대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자위를 하고 있었다. 그땐 그게 자위인지 뭔지도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까 그게 그 짓이었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50원짜리인지 100원짜리인지 동전을 주며 가게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사도 좋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가게까지 가는 길은 큰길 하나인데 그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할머니가 나의 독립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까? 길을 걷다가 실수로 동전을 떨어뜨렸는데 땅바닥을 또르르르 굴러가서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는 게 재밌었나 보다. 나는 동전을 주워서 다시 떨어뜨렸다. 동전이 또 저만치 굴러가다 멈춘다. 동전을 또 굴린다. 멈춘다. 또 굴린다. 멈춘다. 그게 왜 그렇게 재밌었을까? 물리 실험이라도 하는 거였을까? 동전을 또 한 번 집어 들어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동전이 길가 수풀 사이로 쏙 들어가 버렸는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풀을 헤치고 한참을 찾던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오던 길을 되돌아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큰 소리로 우니까 할머니가 깜짝 놀라서 안아준다. 나는 그 따뜻한 품이 좋다. 충분히 어리광을 부릴 수 있어서 좋다. 동전을 실수로 잃어버렸다고 했지, 그 위험한 놀이를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를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돈을 주머니에 꼭 넣고 가야 한다며 새 동전을 주었다. 나는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손에 땀이 나도록 꽉 쥐고 다시 가게로 걸어간다.


다른 날의 기억도 있다. 혼자 길을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마을 아이들 몇 명이 신이 나서 걸어온다. 오빠들이 어디서 뱀을 잡았는지 주웠는지 뱀의 목에 노끈을 감아 질질 끌고 개선장군처럼 걷고 있다. 개울가에서 그걸 지켜보던 아저씨들이 꼬마들에게 그 뱀이 어디서 났는지 묻고, 아저씨에게 팔라고 한다. 아이들은 푼돈에 사냥감을 팔았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보니 개울물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아마 저 위에서 아저씨들이 뱀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제거한 후 요리했을 것이다. 어린 나는 빨갛게 물들어 흐르는 개울물을 보며 걸어간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면서 그 붉은 물을 관찰한다. 나중에 교회에서 출애굽기의 첫 번째 재앙에 관해 배울 때 이 장면을 떠올렸다. 피로 물든 나일강이라니... 나는 피로 물든 강을 이미 보았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왔던 밤이 생각난다. 할머니의 걱정하는 소리에 나가보니 시냇물이 불어서 냇가에 바짝 붙은 할머니 집을 삼킬 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장마철에 나는 처마 아래 댓돌에 깊게 파인 홈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걸 한동안 지켜보고 있다. 한 방울씩 떨어진 물이 돌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그날 이후로 그 돌을 매일 관찰하고, 비가 올 때마다 그 돌 앞에 앉아 있곤 했다. 인천 집에 돌아가서 지내다가 일 년 만에 다시 할머니 집에 가면 비 오는 날을 기다려 그 돌 앞에서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기적을 응시하곤 했다.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작은 댐이 있었는데, 비가 오고 나니 물이 거친 소리를 내며 흘렀다. 시골의 작은 댐은 어설프게 판자 같은 걸로 얹어 놓은 모양이라 위험해 보였다. 그 위를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건너가려니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할머니는 내 발을 살펴주고 손을 꼭 잡아주면서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나는 눈을 절반쯤 감고 할머니의 손을 꽉 붙들고 그 센 물살을 외면하며 겨우 건넜다. 시내 건너편에는 거짓말처럼 온통 딸기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때 딸기밭을 처음 보았는데 그 초록잎과 빨간 과육, 흰 꽃이 어우러진 모습 달콤한 향기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노지의 딸기밭에서 주먹만 한 딸기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할머니는 그냥 따 먹어도 된다고 했다. 논산 딸기는 지금도 유명하지만 그때 나는 딸기가 논산의 특산품이라는 것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저 무서운 물을 건넌 후에 만난 드넓은 딸기밭, 그 아찔한 향기, 입안 가득 퍼지던 달콤한 과즙 같은 것의 느낌이 대조적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느 날인가는 나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전도사님 계세요? 하며 할머니를 찾았다. 어린 내가 나가서 할머니가 안 계신다고 하니 아주머니는 커다란 소쿠리에 가득 담긴 딸기를 내려놓으며 할머니 하고 맛있게 먹으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돌아오기까지 나는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며 딸기 소쿠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할머니의 발소리를 듣고 깡충깡충 뛰면서 누가 딸기를 잔뜩 주고 갔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그중에 제일 이쁘고 큰 딸기를 골라 내 입에 넣어주신다. "딸기가 많기도 하네. 우리 지혜, 할머니가 딸기잼 만들어 줄까?" 할머니는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웠다. 커다란 솥단지에 딸기와 설탕을 넣고 큰 나무 주걱으로 저어서 딸기잼을 만들었다. 나는 시판 딸기잼보다 덜 끈적거리고 덜 달고 색깔도 예쁘지 않지만 과육이 살아 있는 수제 딸기잼을 지금도 좋아한다. 집에서 만든 딸기잼에서는 할머니의 손맛이 느껴져서 정답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수제 딸기잼을 대접하며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했더니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딸기잼이라는 말이 마치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감바스나 할머니 손맛이 담긴 라자냐라는 말처럼 이국적으로 느껴진다며 웃었다. 그런가? 원래 딸기잼은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하고 짐짓 놀라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습고 즐거웠다. 나에게 이렇게 풍요롭고 사랑 넘치는 기억이 있는 것은 다 할머니 덕분이다.


1학년 때인가, 방학에 나는 또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딸기잼을 먹고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기도 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인천 집의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로 소통하다니 참 옛날이지. 그때는 1985년이나 86년쯤 되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전화기가 없었다. 할머니는 하얀 봉투를 들고 나를 불러 옆에 앉히고는 봉투를 읽어주었다. 받는 사람은 서보라. 할머니 이름이다. 할머니는 점순이라는 이름이 싫어서 보라로 개명하셨다. 여기서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신여성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때는 법적 개명이 어려워서 법적으로는 여전히 점순이었지만 할머니는 사회생활을 하며 전도사로 이름을 날릴 때는 훨씬 세련되고 젊은 이름으로 활약하고 싶어 했다. 할머니가 나를 곁에 바짝 앉히고 편지를 한 자 한 자 읽어준다. 밤중에 엄마가 동생을 재워놓고 철야기도를 간 사이에 동생이 혼자 일어나 울고 불며 소리 지르다가 엄마를 찾아 밤길을 헤메고 다녔다면서 어린 동생이 혼자서 잠을 자는 일이 걱정되니 나를 인천으로 다시 불러와야겠다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서 슬픈 지점은 이거다. 엄마는 일하면서 애를 둘씩이나 돌보기가 힘들어 누군가를 떼어놔야 할 때는 큰 나를 떼어놓고 어린 동생을 끼고 지냈다. 나는 커봤자 다섯 살, 일곱 살, 여덟 살인데도 나는 '큰애'이기 때문에 항상 나를 떼어 놓는다. 내가 일찌감치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할머니와 최고의 행복한 순간을 누릴 때 엄마는 동생이 외롭고 힘들고 불안할까 봐 "동생을 위해" 나를 다시 불러올린다. 내 역할은 엄마의 짐이 되지 말고 얌전히 할머니와 지내다가 엄마를 도와 동생을 돌보기 위해 다시 그 곁으로 가는 것이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인데도 나는 벌써부터 이런 운명을 지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할머니와 시골에서 더 지내고 싶었다. 할머니 품에 안겨 더 응석받이로 지내고 싶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커다란 솥단지에 푹 고아서 만들어주는 딸기잼이 더 먹고 싶었다. 동전을 잃어버리고 울어도 토닥거려 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달래주는 할머니 곁에서 머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곧장 인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논산에서 인천까지 먼 여정을 떠났다. 할머니가 엄마를 위해서 논산에서 인천까지 손녀딸을 데리고 왔다 갔다 했다는 게 놀라운 이유는 할머니에게 자식이 열한 명이나 있고 손자와 손녀는 그 두배로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귀하지 않았으면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했을까.


할머니는 시골 교회의 전도사님이었다. 논산에서 할머니는 꽤 유명했는데 할머니에게 기도를 받으러 멀리서 찾아오는 신도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할머니는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이끄는 일을 오랫동안 사명으로 삼으셨다. 할머니는 많이 배우진 못했어도 세상 이치에 밝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분이었다. 할머니의 이름이 높아지고 이웃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존경받으니 교장 선생님이던 할아버지는 그걸 참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심하게 때렸고, 욕했고, 마을을 끌고 다니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밖으로 돌며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할머니는 굽히지 않고 전도사로 살며 다른 지역까지 나가서 설교하거나 부흥회를 하고 기도를 하러 다니곤 했다. 할머니가 열한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도 엄마로서만 살지 않고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녀들의 반발도 꽤 컸다. 이모들과 삼촌들은 할머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원망이 크기도 했다. 다른 엄마들처럼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엄마와 이모 한 명만 가장 처음부터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할머니의 뜻을 따라 살았다.


논산 부적면에는 할머니가 세우고 오랫동안 사역하던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교회 마당 한가운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앵두나무. 어린 나는 지루한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앵두를 따 먹었다. 앵두나무는 내가 빙 돌아가면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아담했다. 그 교회는 엄마가 결혼하기 전 10대 후반에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하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의 온도와 습도, 냄새, 그곳에서 흘러나오던 찬송가 소리와 기도소리까지 모두 기억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할머니의 일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누워 잠이 들기도 한다. 따뜻하고 평온하다. 나는 그때도 가난했지만 아직 가난을 몰랐고, 인간관계의 고통도 세상의 풍파도 겪기 전이다. 할머니는 나에게 최초의 따뜻한 기억이다.


할머니는 그 동네에 마련된 선산에 할아버지와 나란히 묻히셨다. 우리 가족은 아주 가끔 그곳에 간다. 할머니 묘소 앞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과일을 깎아 먹고, 엄마는 쑥과 냉이를 캐러, 아빠는 벌초를 하러, 나와 동생은 옛날 얘기를 하며 천천히 걷고, 아이들은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작은 벌레에도 갖은 소동을 피운다. 산소에서 나와 예전에 그렇게 크고 없는 게 없어 보이던 시골 구멍가게 앞을 걷는다. 할머니의 교회가 보인다. 교회에서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할머니 집이고, 그 아래는 시냇물이 흐르고 그 건너에는 아찔한 딸기밭이 있었다.


영원히 개발되지 않을 것 같은 낡고 낡은 시골동네가 모두 비슷하듯 사람이 적고, 빈터는 황량하며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할머니가 살던 집은 이제 낡아서 아무 멋이 없이 바랬다. 눈처럼 하얀 조약돌이 끝없이 깔려 수정처럼 맑던 시냇물은 이제 없다. 조약돌은 서울이나 경기도, 아니면 대전이나 세종의 어느 아파트 건물을 꾸미기 위해 포클레인이 와서 다 퍼가 버렸다. 흙바닥이 드러나자 수초가 무섭게 자라났고, 물은 흐려졌다. 건너기 무섭던 댐을 다시 보니 너무 작아서 우습다. 할머니의 집도, 교회도, 길도, 시냇물도 모두 작아도 너무 작다. 그때 나는 얼마나 작았던 걸까. 어릴 때 추억이 깃든 장소는 모두 신도시가 되어 밀려나갔는데 논산시 부적면만은 너무 시골이라 발전 가능성이 없어 그때 모습 그대로 박물관이 되고 있다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랄까. 더럽고 낡았을지언정 그 집과 교회, 그 시냇물이 거기 있고 할머니가 거기 묻혀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향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요즘 어릴 적 생각을 많이 하는데 미화된 기억은 있어도 진짜 좋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내 삶에 유일하게 따뜻하고 풍요로운 기억들은 학교도 들어가기 전 할머니와 함께 했던 일이다. 할머니는 내가 크는 동안에 다른 손주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애정을 보내주셨지만, 나는 할머니에게 내가 특별한 손녀였다고 기억하고 싶다. 나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어쩌면 나는 이 힘으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커다란 옹기 시루에 곱게 빻은 쌀을 한 바가지 붓고 평평하게 펼친다. 팥고물을 한 사발 넣고 평평하게 펼친다. 그 위에 다시 쌀가루, 또 팥고물을 반복해서 올린다. 삼베천으로 맨 위를 덮고 옹기 뚜껑을 닫아 불에 올린다.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찬송가를 불러주며 떡이 익기를 기다린다. 뚜껑을 열고 삼베천을 걷으니 뜨거운 김이 훅 올라오는 달콤한 시루떡. 우리 이쁜 손녀딸. 우리 떡보! 할머니가 떡보 먹으라고 떡 맛있게 했지~! 할머니는 뜨거운 떡을 천천히 먹으라며 내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따뜻하다. 나는 그걸 먹고 컸구나. 궁핍하고 차가웠던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는 내 안에서 사랑이 나온다면 그 이유가 바로 할머니가 오롯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시루떡과 할머니의 손맛이 담긴 딸기잼 덕분이 아닐까?


올봄에는 할머니 산소에도 가고 할머니 집과 교회도 보러 가야겠다. 논산에 딸기가 지천일 때. 호젓이 홀로. 할머니와 나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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