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슬픔 앞에서 겸손함을 배우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다음 해 가을, 아빠는 재혼을 하셨다. 할머니가 아빠의 재혼을 서두르셨다. 아빠가 새엄마와 집으로 온 날, 아빠 옆에서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줌마가 낯설었지만 더 이상 '엄마 없는 애'라고 놀림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누군가에게 '우리 엄마예요'라고 말할 사람이 있다는 거 만으로도 충분했다.
몇 달 후, 혀로 입술을 핥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빠가 있어서 엄마 말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아홉 살 인생에서 난생처음 맞았다. 벌겋게 부은 종아리를 만지며, 울음을 꾹꾹 참아가며 알았다.그 날 이후, '엄마'는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었다. 집은 더 이상 마음대로 웃을 수도 큰 소리를 낼수도 없는 얼음장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따뜻한 온기가 사라진 집에서 혼자 울고 혼자 견디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부터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을 지닌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친구들의 '엄마'와는 다르다는 거를 티 내지 말아야 했다. 누구를 만나던, 어느 자리에서든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외롭고 서러웠다. 온전히 솔직할 수도, 온전히 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도 없는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마음은 외로움으로, 무서움으로, 부끄러움으로, 수치심으로 시시때때로 요동쳤지만, 한 겹 꺼풀을 벗기면 언제나 슬픔이었다. 아홉 살에 슬픔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자라지 않는 아이'는 대지의 작가 펄벅이 세 살 된 딸이 정신지체라는 진단을 받은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녀는 '세상에는 달랠 수 있는 슬픔과 달래 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 달랠 수 있는 슬픔은 살면서 마음속에 묻고 있을 수 있는 슬픔이지만, 달랠 수 없는 슬픔은 삶을 바꾸어 놓으며 슬픔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사라지는 슬픔은 달랠 수 있지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은 영원히 달래 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끝나지 않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만 보고 목소리만 들어도 구분해 낼 수 있다'라고 했다.
슬픔의 인생은 무력하고 아프고 쓸쓸하다. 자주 넘어지고 쉽게 무너진다. 슬픔이 방파제를 넘어가면 다른 사람까지 슬픔에 휩싸이게 하고 상처를 줄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슬픔에는 힘이 있다. 슬픔의 사람을 알아보는 세심한 안테나가 있어 소외되고 있는 이들을 빨리 알아본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유독 구석자리에서 말없이 있는 이들에게 마음이 먼저 가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슬픔의 인생은 애도의 소중함을 안다. 어렵사리 꺼내 놓은 슬픔에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는 너무나 쉽고 간단했다. 그래서 어설픈 위로보다 침묵이 훨씬 낫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알게 되었다. 백가지 말로 위로하는 것보다 고통과 시간을 견디고 흔들릴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을 아는 사람은 슬픔을 위로할 침묵의 언어를 지닌 사람들이다.
어릴 적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들은 슬픔의 사람들이다. 사회에 부적응하고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의 우물을 지닌 것뿐이다. 가끔씩 우물 깊숙한 곳에 들어가 혼자 견디고 아프고 외로울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 시간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오롯이 혼자 겪는 시간이기에, 세상의 모든 슬픔은 혼자 견디고 아프고 외롭다.
그래서 슬픔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슬픔 앞에 겸손하다. 자신의 슬픔으로 타인의 슬픔의 크기를 함부로 재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함부로 섞지 않고, 아는 척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슬픔을 존중하며 슬픔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기다릴 뿐이다.
어릴 적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을 만난다면, 그에게서 슬픔이 남긴 상처만 보지 말고, 그래서 그가 지금 어떤 부적응 상태에 있는지만 주목하지 말고, 그가 홀로 슬픔과 상처에서 배워가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회복시켜 온 시간과 노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