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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Feb 09. 2024

추억, 한 그릇 뚝딱!

산골 풍경 일기

힘들게 빚으신 만두를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고모님

추억, 한 그릇 뚝딱!

- 그믐달 그믐 즈음 산골 풍경


그믐날이다.

이맘 때면 구겨지고 빛이 바래서 뚜렷하게는 아볼 수 없을 정도의 흑백 사진처럼 떠오르는 어렸을 때 보았던 풍경이 조각조각 스르 올라온다. 먹을 것 귀하던 시절, 고기는 더더군다나 보기 어렵던 산골짜기에서 겨울만 되면 토끼몰이와 꿩 사냥을 한 뒤 잔치를 벌이던 풍경이다.


한쪽에서는 토끼 가죽을 벗기던, 또 한쪽에서는 꿩을 손질하던, 나무판에 자구로 꿩고기를 다지던, 빙 둘러 선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던, 가마솥에선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던, 겨울이면 으레 껏 한 번씩은 펼쳐지던...,


초등학교 졸업하고 대처로 나간 뒤 이런 기억은 추억의 풍경으로 박제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박제됐던 풍경이 스르르 꿈틀거리는 현실로 되살아 나고 있다. 고모님의 만두 덕분이다.

고모님은 그 옛날 겨울철만 되면 빚어 먹던 만두를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한 번도 거르는 법 없이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몇 날 며칠 빚고 계신다.




만두의 유래는,

<제갈량(諸葛亮)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심한 풍랑을 만나자 종자(從者)가 만풍(蠻風)에 따라 사람의 머리 49개를 수신(水神)에게 바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에 제갈량은 살인을 할 수는 없으니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빚어 제사를 지내라 했고 그대로 했더니 풍랑이 가라앉았다.

우리나라는 조선 영조 때의 사람 이익(李瀷)의 글에 만두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전에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늘 먹는 음식이 아니라 겨울, 특히 정초에 먹는 절기 음식이다>

라고 지식 백과에서는 알리고 있다.




어쨌든, 만두는 껍데기도 맛있어야 하고 속(소)도 맛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으로 고모님은, 만두소를 만들기 전 먼저 밀가루 몇 킬로를 양푼에 쏟아붓고 치대어 반죽을 해두신다. 얇으면서도 찢어지지 않고 쫀득쫀득 쫄깃한 만두피로 만들기 위해서다.

한편, 가을에 담근 김장 김치를 한 양푼 꺼내와 잘게 썬다. 아니 고기 다지듯 다진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여러 모의 두부와 당면도 다져둔다. 큰 맷돌 다리를 고무 대야에 걸치고 자루에 다진 김치를 넣고 짠다. 너무 꽉 짜도 안 되고 덜 짜도 안 된다. 두부던 김치던 알맞게 짜는 게 진짜로 중요하다. 맞춤하게 짜는 건 오랜 경험으로 아는데 짜는 건 며느리 몫이고, 알맞게 짠 재료를 한데 모아 만두소 버무리는 건 고모님 몫이다. 그래야 고모님표 만두가 된다.

고모님표 만두소는 돼지고기 또는 닭고기를 넣는데, 나를 위해 준비하실 땐 들깨가루를 아주 많이 넣으신다. 고기 대신이라며.


고모님표 만두

소를 다 만들고 나면 바닥에 보자기를 깔고 그 위에 큰 도마를 놓고 숙성된 반죽을 꺼내 적당한 크기로 떼어내 동글동글 빚어 밀가루를 묻힌 뒤 밀대로 밀어 동글납작한 피를 만든다.

만두는 혼자 빚는 것보다 여럿이서 분업(?)을 하면 좋다. 옛날이야기 들어가며 한쪽에서 만두피를 동그랗게 밀어주면 한쪽에서는 만두소를 넣고 빚는 식으로.

고모님의 만두는, 가족은 물론이고 맛을 본 이들은 팔라고 하거나 다니시는 교회에서도 겨울철 예배날이나 신방 때는 주문을 할 정도로 맛나다 소문났다.



안반에 홍두께는 아니지만 주전자 뚜껑으로 떼낸다.

어릴 때 우리 집 만두 빚는 날 풍경도 덩달아 일어난다.

그믐이 아니어도 눈 쌓이는 겨울날, 꿩을 잡을 때면 꼭 빚곤 했다. 만두다. 번거롭게도 나를 위해서는 김치와 두부만으로 만든 소를 따로 덜어내 따로 빚어 두셨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둔 밀가루 반죽을 안반(案盤)에 놓고 밀었다. 홍두깨로 이쪽저쪽 돌려가며 한참을 홍두깨에 감았다 풀었다 밀어대면 반죽은 둥글고 널따랗게 얇아졌다. 두께가 맞춤 허다 싶으면 홍두깨에서 풀어 촤악- 펼친다. 

방의 절반은 차지하는 것만 같은 그 둥글고 얇은 반죽 판에 스텐 밥그릇 또는 두 되짜리 양은 주전자 뚜껑으로 꾸우욱- 눌러 동그란 모양의 동그란 만두피가 생겼다.


한 장씩 들고 손바닥과 손가락을 오므려 소를 넣은 뒤 양쪽을 오므려  꼭꼭 붙인 뒤 가운데를 콕 집어 주면  배 나온 삼각 고깔 모양의 만두가 생겨났다.(이곳 만두모양)

널따랗던 둥근 반죽판이 따름따름 작아지도록 어른들이 열심히 만두를 빚고 있을 때 우리 애들은 들락날락하면서 주전자 뚜껑이 떼어내고 남은 삼각 사각 자투리들이 다시 뭉쳐지기 전에 얼른 슬쩍 빼돌렸(?)다. 화롯불에 구워 먹기 위해서다.

지금은 맛볼 수 없는, 달큼 구수한 밀가루떡 구운 맛이 그때는 참말로 맛났다. 들켜서 뺏기지 않으려고 잽싸게 빼돌리는 맛도 재미졌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고 지금은 꿩-꿩- 하고 우는(?) 꿩을 못 본 지도 오래고, 스텐으로 된 애들 밥그릇도 없고, 양은 주전자 뚜껑도 없고, 안반에 홍두깨도 없다.

더군다나 집에서 만두나 떡을 만드는 일도 거의 없는 데다가 만두피 반죽도 기계로 미는 데다 웬만하면 사 먹는 게 익숙한 세상이 됐다.

참 편리한 세상이고 언제든 먹을 수 있는 만두지만 사 먹는 만두 맛은 뭔가 빠진 듯하고 만두를 먹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같은 크기 같은 모양 같은 무게에 열량이나 영양분 칼로리까지 똑같아 똑같은 맛이 나는, 그게 기계맛인 것만 같아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만두 공장 대표나 만든 사람들이 들으면 싫어할지 모를 일이겠으나 내게 만두는 달큼 구수함에 시큼 짭조름 고소함 매콤함 쫄깃함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런 만두를 만나면 한 그릇으로는 아쉬울 정도로 후루룩 뚝딱 해치운다.

추억을 먹는 것이다. 추억은 그렇게 훅- 지나간다.


이젠 몇 년에 한 번씩 어쩌다 빚게 되는 만두.

산골도 이젠 예전의 산골이 아니다.

만두를 빚는 집도 드물고 집에서 차례를 지내지 않는 집도 늘어 가며, 명절 음식을 만드는 대신 이름난 식당에서 사 먹는 가족들이 늘어가고 있다.

빛바랜 사진 같은 추억의 음식이 있냐고 물으면 식당 이름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행복하시고 아무튼 평안하시고 모쪼록 무탈하시길 바라는 그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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