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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Jul 19. 2024

한 철만 빼고 다 바쁘다

시를 읽다가

내가 사는 평창 지역은 봄이 왔어도 다른 지역보다는 좀 추운 이라 모든 농작물과 꽃나무들을 심고 가꾸는 건 물론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는 시기도 다른 곳보다는 늦는 편이다. 늦을 뿐이지 건너뛰는 과정은 없다.

시기를 잘 맞추어 심었을지라도 기후 위기로 예년과 달라진 날씨는 노심초사하게 만든다.

곳은 그나마도 나은 편이다. 여기보다 몇 도 더 낮은 이웃면 대관령 산간 마을, 올해만 해도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가 심었을 모종이 5월 15일 내린 함박눈으로 뜨거운 물에 데친 듯 냉해를 입고 말았다.

농작물이 무탈히 잘 자라주면 주는 대로 일이 많다.


옛날 사람들은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듣고 큰다'라고 하였지만 오늘날은 벌레 먹은 게 없이 말끔하게 키우느라 자주 살피고 약을 치느라고도 바쁘다. 요즘은 더군다나 가물 땐 뜨겁도록 가물다가 비가 올라치면 쏟아붓듯 왕창 오니까 더 자주 치는 듯하다.

이렇듯 땅에 심은 농작물은 하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 또한 날씨에 따라 바쁘거나  바쁘거나 심각해지거나 한다. 부지런함만으로는 안 되는 게 농사기에 옛사람들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하였나 보다.




사실 시골 살이큰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텃밭이나 꽃밭이 딸려 있는 집이라면 봄부터 바쁘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읽는다면 누구나 저절로 '맞다 맞어!' 끄덕이고도 남을 일이다.

장마 전에 난 정말 바쁘다
감자알을 캐고 블루베리를 따고
오이를 따 소금에 절이고
별목련과 팥배나무를 캐다 심고
정원의 꽃나무들 가지치기를 하고
수로를 파 물길을 내주고 나면
나의 7월은 끝, 휴가다  
                       - 박노해, [관상 휴가] 가운데 -

삶이 글이고 글이 삶인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면 마치 내가 그 글 속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아마도 실제 나의 삶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곳보다는 따뜻한 곳의 어느) 텃밭에서 장마 대비로 바빴을 시인의 일상이 눈으로  듯 그려진다. (아마도) 시인은 장마 전만 바쁜 게 아닐 거다. 나도 그렇다. 얼었던 땅심이 풀리면서 겨울잠 자다 깬 풀(개구리나 곰만 겨울잠자는 게 아니다)들이 겨울 동안 땅바닥에 납작 붙여 검푸릇 짙붉어진 이파리를 빳빳하게 곧추세우는가 싶을 때면 땅속에서 잠자던 씨앗들도 덩달아 경쟁하듯 여기저기서 막 올라온다. 꽃밭이든 텃밭이든 여름도 오기 전 마구 올라오는 이 풀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가을 떨어진 꽃씨들이 여기저기서 아무 데서나 막 올라오는데, 싹을 틔운 곳이 큰 꽃나무 밑이라면 빛도 못 보면서 여리여리 살다가 끝내는 비바람에 꺾여버릴 거고, 마른 씨앗이 봉오리 째 떨어진 자리에서 콩나물처럼 수북이 올라오는 싹들은 포기를 나누어 심지 않으면 크지도 않을뿐더러 그대로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이 더불어 사는 곳이니만큼 꽃밭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옮겨 심거나 뽑아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야말로 작은 수풀 쑥대밭이 되고 만다.


초여름에 접어들고 비가 짬짬이 내리기라도 한다면 '뽑고 돌아서면 또 그만큼 자라 있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풀들은 걷잡을 수 없이 쑥쑥 자란다.

그리고 텃밭이라도 있다면 누구나 흔하게 하는 말이 풀과의 전쟁, 풀과 씨름하느라 바쁘다는 말이다.


바랭이와는 사돈을 맺지 않는다는 닭의 장풀(이곳은 닭의 상다리)은 뿌리 째 뽑혀 다른 풀들과 몇 며칠 쌓여있도 녹아 없어진 다른 풀들 속에서 신기방기할 정도로 꼿꼿이 살아있다.

마디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며 사방팔방 뻗쳐나가는 바랭이, 뿌리가 튼실한 바랭이 이웃사촌 풀, 그냥 놔두면 지팡이 재료가 되는 명아주 말고도 뽑을 풀들은 천지삐까리다.




봄에 모종으로 심은 토마토, 쑥갓, 상추. 가지, 고추, 바질, 한련화는 크는 것 봐가며 손길을 달리 야 한다. 토마토는 지지대를 세워준 뒤 이삼일에 한 번씩 끈으로 묶어 주어야 하고 곁순도 따주어야 하는데 고추나 가지도 마찬가지다. 상추나 쑥갓, 바질은 큰 비가 오기 전 겉잎을 따주어야 녹아 없어지는 일이 없고, 꽃밭이나 텃밭은 풀을 뽑으면서 물이 잘 빠지도록 물길도 내주어야 한다. 

틈틈이 뽑느라 해도 미처 다 못 뽑는 풀밭의 풀은 풀 깎기(機) 힘을 빌려야 한다. 이 또한 한 번으로는 안 된다. 시원하게 쳐냈다 싶어도 비가 며칠 동안 연이어 오면 풀밭은 언제 풀 깎았던 적 있느냐며 숲으로 바뀌어 있다. 무릎보다 더 웃자라 있는 풀은 하루 이틀 땡볕에도 억세디 억세져 한 번에 잘리지도 않는다.


나의 여름휴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상觀想 휴가  
문 앞에 “묵언 중입니다. 방문 사절. 미안.”  
팻말을 내걸고 전화기도 뉴스도 끊고  
테라스에 집필 책상과 의자를 치우고  
낮고 편안한 의자를 놓고 기대앉아  
묵연히 앞산을 바라보다 구름을 바라보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지켜보고  
불볕에 이글거리는 들녘을 바라보다가  

  ..... 중략.....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쓰지 않고  
눈앞의 풍경과 눈 감은 세계와  
두 세상 사이의 유랑 길에서  
분주한 세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상념과 감정과 고해와 내면을  
오롯이 지켜보는 깊고 치열한 쉼  

내 여름 관상 휴가 끝  (... 후략...)

시인은 감자와 블루베리를 따놓고는 관상 휴가에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의 감자는 하지 때도 캐질 못한다. 늦게 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마철이 지나고 이파리가 누렇게 마르면 캐야 하는데 그때까지 감자가 썩지 않고 잘 견뎌주길 기다려야 한다.

바쁜 일 끝낸 시인, 치열한 쉼이 아닌 걸림 없고 편안한 쉼이길 응원하고 싶다.



일주일 동안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다. 구름을 몰고 오는지 후덥지근한 가운데 바람이 요란스럽다.

텃밭의 채소들, 비에 녹아버릴까 봐 서둘러 딴 뒤 흙먼지를 닦으며 벌레알은 없는지 한 잎 한 잎 앞뒤로 살펴가며 잘 씻는다. 안이 훤히 보이는 통에 담고 뚜껑을 덮어 냉장고에 넣어두면 비가 오는 동안의 반찬으로는 아주 넉넉할 거다.  자란 애호박도 따둔다.

막 씻어낸 싱그럽고 빛깔 고운 상추와 바질 그리고 깻잎과 한련화가 내뿜는 향긋함이 부엌을 가득 채우는 걸 누리는데 토도도독 빗소리가 들린다.


지붕 빗물받이에서 떨어지는 폭포 같은 빗물에 마당이 패이지 않도록 또한 물길을 내주어야 하고, 며칠 전 손을 본 지붕 빗물받이와 물길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살펴본다. 실리콘 사이로 빗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다. 처마 바깥쪽으로 흐르도록 이것저것을 써서 괴어놓고, 물받이로 모여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두는 한편 넘치면 흘러가도록 파놓은 물길로 잘 흘러가는지도 살핀다. 아직은 괜찮다.


새벽에 잠시 멈칫하던 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진다. 문을 열고 내다 보니 빗물받이로 미처 흘러가지 못하는 빗물이 중간에서 넘쳐 쏟아지는데 바람까지 불어대니 갈 곳 잃은 빗줄기가 춤을 추듯 허공에서 흩뿌려지고 있다. 마당 여기저기엔 올챙이가 놀기 좋을 만한 작은 웅덩이가 생기다가 어디론가 흘러갈 곳 찾느라 구불구불 아무 데고 파고든다. 호미를 들고 물이 달려가면서 아무렇게나 내놓은 길을 중간중간 끊어서 다듬는다. 돈 들여 만들어 놓은 둑이 더 파여나가지 않도록.


그나마 온종일 퍼붓지 않아서 다행이고 다행이다. 이대로 쭈욱 다행인 마음으로 가을을 맞고 싶다.

전국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안타깝고 슬픈 소식 대신 다행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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