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일주일 남짓 앞둔 9월 중순이면 낮이어도 긴팔옷을 입고 저녁이면 솜옷을 입어야 하는 봉평인데, 유난스레 덥고 뜨거웠던 여름 날씨는 아예 눌러앉기로 작정했는지 여전히 덥다 못해 뜨거워 한 줄기 바람이 무척이나 고마운 오후,조용하던 맞은편 버스킹 부스가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사람은 안 보이는데 커졌다 작아졌다를 되풀이하는 연주곡이 메밀꽃밭을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일정표를 보니 오늘 오후 1시, 3시, 5시는 '피리 부는 이장'으로 알려진 '리코더 연주가 최선진' 님의 공연이 있는 날이다.
(조금은) 아는 연주가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반갑다.
기억을 더듬으니 첫 만남은 십 년 전쯤이다. 지인이 기획한 문화 공연이 평창의 감자꽃 스튜디오에서 있었고, 리코더 연주가의 공연도 있는 자리였다. 클래식은 물론 음악에는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과 함께 앙코르(encore)를 외쳤고, 리코더 연주가는 특별히 나를 위한 연주를 두 곡 더 들려주었다.
'피리로 이렇게 맑고 고운 연주를 하다니...!'
대금이나 오카리나, 플룻 연주만 (그것도 앨범으로만) 들어봤던 나로서는 신세계였다.
하여 고마운 마음도 함께 저장이 돼있지만, 그 뒤로는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가 평창 동계올림픽 때 성화 봉송 주자와 자원봉사자로, 진부면의 어느 마을 이장으로, 월정사 합창단 단장으로, 전나무숲 공연자로, 알펜시아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음을 (순전히) 페이스북 덕분으로 알고 있기에.
연주 무대와 그 앞 풍경
아직 본격으로 연주하기 전 튜닝(tuning)을 하는 것 같기에 안나푸르나 홍차를 우린 뒤 식혀서 가지고 갔다. 차를 건네며 "소식 (페북으로) 잘 보고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연주가는 (페이스북 포스팅에) "좋아요, 해주셔서 고맙다"는 대답과 함께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제일 뜨거운 한낮이라 그런지 이쪽이나저쪽이나 사람이 거의 없다.
첫 곡이 끝나고..., (다행히도) 나와 담마벗 그리고 지나가던 (메밀꽃) 관람객 두 명이 '우와~~'라는 감탄사와 손뼉을 쳐주는 것으로 무관중 연주는 면하게 됐다.
계속 그 앞에서 듣고 싶었지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운지라 응원의 마음을 담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저기 가서 들을 께요. 끝나고 차 드시러 오세요~~"를 외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메밀꽃밭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연주는 한 시간 동안 계속됐고, 몇 백 미터 건너편에 있는 우리는 큰 소리로 화답을 해주었다. 버스킹 부스에는 딱딱한 의자 대신 반쯤 누울 수 있는 빈백 소파가 열 개쯤 있지만 거의 비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사람이 꽉 찼다. 관람객이 많이 들어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장애인 시설에서 단체 여행을 온 것이었다. 장애인 한 명과 비장애인 한 명이 짝을 이루어 메밀꽃밭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다가 편안한 소파에 누워(?) 클래식 연주까지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날씨가 도와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구먼 날씨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가는 사람 거의 없는 한 낮의 풍경
버스킹 부스 또한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밭가에 있었고 우리와 똑같이 벽이 없이 세 개의 지붕이 이어진 쉼터였다. 그러니 제대로 된 무대 같은 건 따로 없었고 바닥은 방수목으로 만든 데크로 이어져 있으며 탁자 대신 빈백 소파가 자리 잡고 있다가 공연하는 이가 있으면 빈백 소파를 데크 아래로 내려놓는 게 전부다.
아, 다른 점 또 한 가지는 버스킹이라고는 하지만 지나던 관람객들로부터 돈을 받는 건 아니었다.
공연료는 하루 세 번 공연을 하는 조건으로
문화제 조직위에서 주기로 했단다.
대신 사람이 있건 없거나 간에 시간 맞춰 공연을 해야 한단다.
문제는 시간에 따라 지붕이 있는 게 무색할 만큼 강렬한 햇볕 한복판이 관람석(?)이라 가뜩이나 덥고 뜨거운 날씨의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공연 관람을 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해날에 공연했던 두 명의 성악가는 자리를 지붕 아래 그늘 쪽을 관람객에게 양보하고 메밀꽃밭 안으로 마이크를 가지고 들어가 공연을 하였다.
하얀 메밀꽃 한복판에 붉은 드레스와 까만 턱시도의 남녀가 허공을 울리는 목소리와 고운 자태로 노래를 하니 제법 어울렸고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리코더 연주가는 손이 자유롭지 못해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음악은 개인 취향이다. 나이나 성별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또는 날씨나 상황, 곳에 따라서도 좋아하는 장르가 다른 걸로 안다.
그러니 멀리 사방은 산, 안 쪽 너른 메밀꽃밭에 사진 찍으며 움직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떤 노래(또는 연주)를 할까! 일정표를 보니 대중가요는 눈에 띄지 않는다. 주로 클래식이다.
하아, 메밀꽃 흐드러진 꽃밭 한복판 무대에서 듣는 클래식 음악이라니...!
뛰어난 실력의 버스커에 스피커 음량만 잘 맞춘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리라.
덕분에 '눈만 호강이 아니라 귀도 호강을 하는구나!' 했는데, 리코더 연주를 끝으로 더 이상 공연은 없었다. '일정표대로라면 아직 몇 번 남았는데..., 듣는 이들이 별로 없어서 안 하는 건가!'궁금해하는데 네댓 명의 일행이 기웃기웃 다가오며 묻는다. "여기 하모니카 버스킹 공연 어디서 해요?"
"버스킹이라면 저 건너 부스인데 오늘 안 하던데요?" "그래요? 우리는 5시 공연 보러 왔는데..., "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 공연을 보러 일부러 오는 이들도 있는데 왜 안 하는 걸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나중에 문화제가 끝나고 알게 된 사실, 버스킹 공연을 본무대에서 하게 했다는 것. 덥거나 비바람이 들이치니까 공연을 하는 이나 보고 듣는 이들이 편하도록 지붕과 무대가 제대로 갖춰진 곳에서 옮겼나 보다. 옮긴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왕이면) 옮겼다고 곳곳에 있는 부스 담당자들에게도 알려주었다면, 버스킹 공연을 기다리거나 일부러 보러 오는 이들이 헛걸음 안 하도록 제대로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