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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라이브러리 Jan 12. 2023

사직에 성공

ISFP 동생 이야기 #1




사직서 파일을 띄워놓고 시원한 기분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절대 시원섭섭하지 않고 그저 시원하기만 하다. 후련하고.


나는 거절을 못하는 인간형이다. 거절의 말을 뱉었을 때 상대가 무안해지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다. 어떤 일을 제안받았을 때, 하고 싶지 않고 그 일을 할 상황이 아니어도, 무의식적으로 네 알겠습니다 가 먼저 튀어나와 버린다. 못 간다는 말을 못 꺼내 무리한 상황인데 굳이 공적인 모임에 나가고, 먼저 가봐야 한다는 말도 못 꺼내 모임이 완전히 끝나야 집으로 돌아온다.


이런 성격에 사직한다는 말을 꺼내야 하다니. 정말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사직서를 제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더글로리 문동은의 몇만 분의 일 정도로는 치밀하게 나름대로 계획해 왔다.


오랜 꿈이었던 일을 하게 되면서, 맡은 업무 자체는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일을 하며 만나야만 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한 지 오래되었다. 다 좋을 수는 없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은 없다, 모든 일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원래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는 법이다라는 진리, 잘 알고 있. 그래서 싫은 마음을 혼자 몰래 떠안고 감추며 몇 년을 보냈다. 그리고 앞서 강조했듯이 참 좋아하는 일이었기에, 일에 집중할 때에는 큰 에너지를 얻어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은 에너지는 그 어떤 사람들을 꾹 참아내는 데에 소모해야 했다. 그럭저럭 버티는 와중에 연차가 쌓이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나를 괴롭게 하던 그들과 오히려 더욱 본격적으로 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


경제적 이득&사회적 지위 vs. 매일의 행복, 건강, 마음의 여유


더욱더 많이 참고 버텼을 때 얻게 될 경제적 이득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싫은 사람들 앞에서 웃는 것을 더 이상 그만하고 매일의 행복과 건강, 마음의 여유를 챙길 것인가. 두 가지 선택 사이에는 양립도, 그 어떤 합의 지점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것만은 확실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무리의 중심으로 들어간다면 나 자신의 건강과 행복은 한동안 지키지 못한다는 것. 그런데 내가 더 이상은 나 자신을 갉아먹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서, 절이 지독히도 싫어져버린 중은 드디어 절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남몰래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대한 원한도 사지 않고, 업무에 차질도 주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급작스럽지 않게 사직을 하려고 애를 썼다. 물론, 아무리 애를 써도 누군가의 말에 오르내리게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겉보기에는 자연스럽도록, 그 사람들이 본인들 때문에 내가 사직하는 것임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세상은 좁고, 누구와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고, 나는 수년간의 연결고리를 일단은 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으니까.


어쨌든 사직에는 성공했으니, 이제 내 인생에서 하나의 이야기는 매듭을 지어놓고, 또 다른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 보려고 한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완전히 놓지 않으면서도, 매일의 행복과 감사함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할 기반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도들을 해 보려고 한다. 물론 쉽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겠지만, 나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차근차근 나아갈 수 있다면, 그로 인해 긴 인생 중 몇 년이라도 더 행복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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