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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화건 Aug 25. 2024

주소록을 펼치고 기억을 되살리다

이별 준비를 위해 가장 먼저 연락처를 정리하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어가면서 마음속에 무어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죠. 답답함도 조금 느꼈지만 그렇다고 궁금해서 미칠 지경은 아니었기에 별거 아니라 여기며 지냈습니다. 문득문득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확실하게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는 데 무작정 매달리기도 그렇고 해서 무시하고 지냈죠

그렇게 무심무념의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불을 정리하던 그날' 우연찮게 실마리를 찾게 되었고, 다음 날 스승님의 빈소를 다녀오면서 확실하게 뭐가 문제인지를 인식하게 되었죠. 소중한 이의 부재를 통해 깨닫게 되었기에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함이 풀리면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Well-dying'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냥 단순한 관심이 아니었더라고요. 저의 무의식 속에 '준비에 대한 욕구'가 있었던 거죠. 그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참 좋았습니다


처음 며칠은 마음이 정말 편했죠. 해답을 찾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기분이 오래가지 않더군요

'이별 준비'를 위해 마음을 다독이고 나서 막상 제대로 시작하려니 막막했죠.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더라고요. 손에 잡히지 않는 큰 덩어리들만 머릿속을 떠다니다 보니 지금 당장 뭘 할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또다시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머리는 풀리지 않는 매듭을 풀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었죠. 그러다 갑자기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휴대전화에서 답을 찾았죠. 평소에도 일 년에 한 번씩 정례적으로 하던 주소록 정리가 바로 그거였죠


그전에도 나름의 기준을 정해서 정리를 해오던 거라 뭐 특별한 게 있겠냐 싶었는데 접근하는 방향을 바꿔 보니 생각할 게 많아지더라고요

주소록을 펼쳐 보았습니다. 적혀있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하는데 기분이 묘해지더군요. 새로운 관점과 방법으로 접근해서인지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게 보였죠. 그럼에도 관계의 문제이다 보니 큰 변화를 주는 건 쉽지 않더군요. '미련'에 대해서 만큼은 단호하게 대하려 했는데도 말이죠


예전 같으면 관계에 문제가 생겨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별일 없었던 것처럼 예전처럼 지낼 수 있었으니까요.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시절이 있었죠

관계에 대한 생각도 나이가 듦에 따라 많이 변하더군요. 젊었을 때는 사람이 많은 곳이 좋았고, 관계도 폭넓게 하려고 노력했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번잡스러운 게 내키지 않게 되고, 깊이 있는 관계를 선호하게 되더군요. 단순한 것도 좋아하게 됐고요


막상 주소록을 정리하려고 하니 머뭇거리게 되더군요. 사적인 사이와 비즈니스 관계는 차이가 있다 보니 딱 부러지게 구분하는 게 정말 어려웠죠. 기준을 가지고 함에도 애매할 때는 어물적 넘어가게 되었고요. 정리를 한다고 하는데도 주소록엔 늘 사람들이 넘쳐났죠


이번에는 달라야 했습니다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더 과감해지더군요. 칼로 무 자르듯 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변화는 있었죠.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다시 정리를 한다는 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니더군요. 한 사람 한 사람 다시 생각해 보니 추억도 감사할 일도 참 많더라고요. 그 시절 인연들이 있어 오늘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물론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들도 있었지만요.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가졌죠


무엇이 되었든 간에 가볍게 한다는 건 좋더군요. 관계의 감량도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계속하기로 했죠


다만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기에 기준을 정할 때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평가하는 게 아니고 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기에 최대한 객관화하려고 노력했죠. 맘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저만의 주소록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 온 관계들이 이리저리 촘촘하게 얽히고 녹아있으니까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최적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번에 깔끔하게 정리가 될 줄 알고 서둘렀는데,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급하게 서둘다 탈 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마냥 미룬다는 건 아니고, 일정한 기간을 두고 수시로 하면서 저만의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을 겁니다


우연한 기회에 깨달은 숙제를 미루지 않고 시작한 제가 대견스럽네요. 솔직히 다음에 무얼 할지 결정은 못했지만,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을 믿기에 첫 시작에 의미를 둡니다. 지금 주변을 유심히 살피는 이유기도 하죠

'못해서 후회하느니 실수해서 창피한 게 낫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은 날을 살기 위해서요


'이별 준비'를 시작한 지금은 첫 단추를 잘 꿴 저 자신을 칭찬하려 합니다.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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